[경상시론]트럼프 ‘미국 우선’의 역사적 의미
지난 20일 트럼프 2기가 출범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세계가 걱정한다. 혼란에 빠진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북한은 핵 국가다” “핵무기를 가진 자와 잘 지내는 것이 좋다”는 트럼프의 말은 충격적이다. 한미동맹과 확장 억제마저 불확실해 보인다. 효과적인 대응책이 마련되어야 할 텐데, 미국의 새 한반도 정책에 우리 목소리를 반영하도록 총력을 다해야 한다거나 “우리도 핵무기를 갖자”라는 상투적 비현실적 주장만 들인다. 트럼프가 왜 ‘미국 우선’ 정책을 채택한 것인지 이렇다 할 설명은 거의 없다. 우리의 명운이 걸린 일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국의 노선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짚어본다.
미국 역사는 ‘예외주의’라는 말로 상징되기도 한다. 여러 면에서 특이해서 일 것이다. 17세기 초 유럽 이주민이 신앙공동체 건설을 다짐한 이래 청교도주의, 시장경제, 자유주의는 미국사를 관통한 핵심 이념이 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텍사스 병합과 멕시코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이 대륙 전체를 손에 넣는 것을 ‘신이 부여한 책무’라 주장했고, 그러한 팽창주의 신념은 19세기 초에 이미 서반구를 ‘구세계’ 유럽과 구분하여 ‘신세계’라 부르며 미국의 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드러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태평양을 건너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면서 ‘기회 균등’에 입각한 무역을 주창했는데, 그것은 실은 유럽의 식민지 독점시장 확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장확대 전략이었다.
제1차 대전은 미국이 무역장벽 제거, 민족자결주의 실현, 국제기구 설치 등을 앞세워 유럽의 구질서를 해체하려는 계기를 제공했다. 제2차 대전 이후 그 구상은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관행을 청산하고 유엔,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을 통해 구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결국 미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2개 세력권을 인정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와 ‘개혁’이라는 시대적 역할을 맡았다. 미국은 2급 국가로 전락한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들이 토해낸 식민지를 관리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이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전도사’가 아니라 스스로 제국이 되어 ‘세계의 보안관’을 자처한 것이다. 자유 제국의 건설, 인종주의, 반혁명 등은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온갖 모순된 행위는 ‘냉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꿈에 그리던 ‘언덕 위의 도시’를 지구적 차원에서 건설할 기회를 얻은 듯했다. 이제 미국적 가치에 도전할 이념과 제도도 없다며 ‘역사의 종언’이 선언되기도 했다. 세계의 모든 나라는 서구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국익보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이바지하고, 민족 정체성을 접고 세계시민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중국의 급부상과 기후위기, 팬데믹, 핵확산, 4차 산업혁명 등 크게 달라진 조건에서도 미국적 가치를 세계로 확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이라 믿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과 함께 “다시 한번 세계에 간여하겠다”하고 천명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그런 인식을 “위험스러운 착각”이라 여긴다. 자유 무역에 몰입한 결과 미국의 중간층은 감소했고, 노동자는 위기에 빠졌고, 산업 능력은 무너졌으며, 주요 공급망은 적과 경쟁국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대규모 이주로 사회와 정부의 안정성이 위협받고 있다. 중국은 새로운 개방적 환경을 이용만 했지 의무와 책임을 저버렸다. 트럼프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가치 중심의 정책을 이익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의 돈이 들어간 모든 계획과 정책은 마땅히 미국을 “더 안전하게, 더 강하게, 더 번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의 처지에서 이는 자연스러우며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미국이 강하고 안전하고 번영해야 세계도 더 나아질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 정책은 이러한 역사 인식과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 이후 30년 미국의 세계화, 세계의 미국화는 망상이었고, 미국은 패권국 역할을 감당할 수 없으며, 그래서 ‘미국 우선’의 길을 간다. 이는 팽창주의와 예외주의 전통을 접었다는 의미다. 당연히 한반도 안보환경의 지각변동이 뒤따를 것이다. 제국적 관성은 일정 기간 유지되겠지만 말이다. 박제된 역사 인식과 안보관에 사로잡힌 한국이 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김정배 전 울산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