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래빌런’의 재등장

2025-02-06     경상일보

울산은 자연환경 측면으로는 영남알프스의 웅장한 산맥과 도심을 가로지르는 태화강,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품은 특별한 도시다. 산업 경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수도로, 낮에는 수려한 자연경관이 밤에는 화려한 공장 불빛이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상반된 매력을 가진 도시다.

현대자동차, HD현대중공업, SK 등 수많은 대기업은 울산이라는 촌 동네 어촌마을에서 작은 공장으로 시작해 중견기업이 되고 또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울산시민과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했다. 그렇기에 향토기업에 대한 울산시민의 감정은 단순히 일자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며 꿈을 키워나간 특별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2024년 9월, 울산을 대표하는 향토기업 고려아연이 MBK파트너스와 영풍 연합 간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됐다. 혹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경영권 다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단순하지 않았다. 인수전에 뛰어든 사모펀드의 최종 목표는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이나 지역 사회와의 공존이 아닌, 단기간에 기업 가치를 끌어올려 최대한의 차익을 실현한 뒤 매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고려아연은 오랜 세월 지역 경제를 지탱해 온 기업으로, 수많은 가정이 그곳에서 터전을 이루며 살아왔다. 부모 세대가 흘린 땀과 헌신으로 성장한 기업이 한순간에 차가운 자본 논리에 의해 해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특히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이 흔히 그렇듯, 인수 후 감원과 구조조정을 단행해 기업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이게 만든 뒤 다시 되팔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곧 정리해고와 지역 경제 위축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고려아연의 매각이 현실화한다면, 단순히 한 기업의 소유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그 기업을 위해 헌신해 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 온 기업이 사모펀드의 이익 실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울산시민들에게 참담한 일이었다.

울산시민은 너나 할 것 없이 움직였다. 지자체는 과거 포스코 한 주 갖기 운동 등의 모티브가 된 SK 주식 한 주 갖기 운동을 부활시켜 고려아연 1주 갖기 운동을 했고 시민단체와 공공기관, 그리고 시민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울산시민들로 구성된 악당, 소위 고래 빌런(Villain)이 등장한 것이다.

이 소식은 지역사회를 넘어 대한민국 경제뉴스 1면을 장식했고, 인터넷에는 흑기사, 백기사를 언급하며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러한 국면 전환은 MBK파트너스와 영풍 연합이 생각지 못한 변수로 작용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백기사를 자칭하는 소액주주들이 꾸준히 몸집을 불려 가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4개월간의 숨 막히는 여론전과 세 확장을 위한 싸움의 결과 2025년 을사년의 시작부터 울산의 대표 향토기업인 고려아연이 MBK파트너스와 영풍 연합의 경영권 공세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과거 SK를 지켜낸 것처럼 또 다시 울산 향토기업을 우선 지켜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모펀드의 입장에서는 본인들이 오랜 기간 준비한 공격이 무산되었다는 것에 황당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이 아직 완전히 승부가 난 것은 아니다. 임시주총이 끝나자마자 MBK파트너스와 영풍 연합은 위법성 등을 지적하며 법적 대응을 시작했고 이제부터는 지루한 법정 싸움이 한참이나 예정돼 있다.

그러나 고래 빌런들과 향토기업 간의 관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복잡한 이해득실로 얽힌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언제나 든든하게 지켜주는 우리는 단순한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를 넘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전우이자, 기쁠 때는 함께 웃으며, 어려울 때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며, 나란히 인생의 길을 걷는 소중한 동반자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로와 용기가 되는 특별한 인연이다. 울산 사람들은 고려아연뿐만 아니라 모든 울산 향토기업과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김용길 울산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외부원고는 본보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