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유홍준 ‘창틀 밑 하얀 운동화’
생각이 많을 때마다 나는
운동화를 빠네
낙엽을 밟고 오물을 밟고 바닥 밑의 바닥을 밟고 다닌 기억이여
깨끗이 빨아놓은 운동화 뒤꿈치에는 물이 고이네
생각의 뒤꿈치에는
늘 물이 고이네
나는 지금 맨발, 슬리퍼를 걸치고 마당가에 앉아
창틀 밑 하얀 운동화나 바라보네
운동화는 고요하고 단정하고
많은 말들을 감추고 있네
신발을 씻었는데
손이 왜
깨끗해졌는지,
할 말이 없는데
할 말이 무엇인지
다 잃어버렸는데
내 생각의 뒤꿈치에는 자꾸만 물이 고이네
내 하얀 운동화는 생각을 버리고 다시 또 길을 나서야 하네
고단한 삶 살아가기 위한 생각 정리
어린 시절 언니는 화나거나 일이 안 풀릴 때 빨래를 들고 냇가에 가서 빨았다. 치대고 두드리고 헹구다 보면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는지 돌아올 땐 콧노래도 부르곤 했다.
운동화를 빠는 일도 비슷한 게 아닐까. 물은 더러운 걸 깨끗이 정화한다.
운동화를 빤다는 건 ‘바닥을 밟고 다닌 기억’, 그러니까 힘들고 더러운 걸 정화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 행위이다. 하얗게 빤 운동화를 창틀에 널어놓으면 마음도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운동화의 뒤꿈치엔 물이 고인다. 물이 고인다는 것은 쉬이 떨칠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나 흔적일 것이다. 할 말이 무엇인지 잊었는데도 자꾸 고이는 물, 말하고 싶지만 정작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어떤 감정들.
그래도 우리는 그 신발을 신고 또 길을 떠나야 한다. 한 번씩 묵은 감정을 털어내지만 그럼에도 떨쳐지지 않는 기억과 손잡고 삶의 길을 한발, 또 한발.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