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금 칼럼]민주주의의 적(敵)
거리의 정치가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찬탄과 반탄’의 격렬한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광장에 모여 시민들이 자유스럽게 의사를 분출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 한 형태로 보일 수도 있다. 마치 2500년전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에 모인 군중들의 함성이 연상된다. 하지만 이는 낭만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아고라가 초기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면 우리의 광화문은 민주주의가 파괴된 분열과 대립의 현장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비민주적 정치인들이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예일대 교수 후안 린츠는 정치인을 ‘진정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와 ‘얼치기 민주주의자’(semi-loyal)로 구분한다. 전자는 공정한 선거결과를 존중하고, 폭동이나 쿠데타 같은 폭력적 수단을 거부하며, 반민주적 세력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단절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자처럼 보이지만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은근히 동조하며 이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자들이다.
이 기준에 비춰 보면 우리 정치인들 중에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자신을 지지하는 극단적인 집단의 요구에는 절대적으로 부응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언어폭력이나 따돌림을 통해 제거하는 방식이 우리 정치의 일상화된 패턴이 돼 있다. 또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선거라고 몰아가는 세력들과 단호하게 절연하지 못하고 오히려 질질 끌려다니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야 할 것 없이 극단적인 사고와 비민주적 주장을 옹호하며 대립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겉으로는 유력정치인이고 차기 주자인 척해도 모두 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일 뿐이다.
그러면 ‘얼치기 민주주의자’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최근 출간된 저서
과도한 법의 사용도 민주주의의 파괴를 불러온다. 어떤 법은 자제해서 사용하도록, 혹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사용하도록 설계돼 있다. 법에 규정된 특정한 권한을 사용할 때 인내심을 발휘하거나 스스로 자제할 것이 요구되는 경우다. 야당이 시도한 29건의 탄핵을 돌아보자. 법적으로 국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탄핵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권한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국무총리, 야당대표를 수사하던 검사, 감사원장, 방송위원장 등을 닥치는 대로 탄핵을 통해 직무를 정지시키는 것은 분명 합법적 활동이지만 과도하다.
계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이고 법적으로 행사 가능한 권한이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경제와 외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자제돼야 하는 권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 법정에서는, 탄핵은 국회의 고유권한이라는 주장과 계엄도 대통령의 합법적 권한이라는 주장이 서로 대립한다. 여야 모두 인내와 절제가 필요한 권한행사의 기본을 망각한 극히 비민주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른바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정치인들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합법을 가장해 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오는 극단적 정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돼버렸다.
정준금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 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