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 연재소설]고 란 살 [1] / 글 : 김태환
나에게 고란살이 있다고 처음 말한 것은 외할머니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가 뭘 알았겠는가. 그러나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덤으로 듣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말뜻을 이해하기보다는 느낌으로 호불호를 판단하기 마련이다. 나는 애써 외할머니의 기분에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무관심으로 일축해 버리곤 했다. 그래야만 집요한 외할머니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집요했다.
“지 애비 잡아먹은 년.”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심기가 고약한 날에는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면 나는 외할머니의 입을 바늘로 꿰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구멍 난 쌀자루에서 쌀이 쏟아지는 광경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바늘로 입을 꿰맬 듯이 달려들었다가는 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이년아. 너는 고란살이 세 번이나 끼었어. 너 같은 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하필이면 갑인일에 나올 게 뭐냐. 에고 팔자도 참 기가 막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울지 않는 계집아이가 있다면 그건 어린애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싸움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어코 내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면 할머니의 태도가 급변했다.
“에구, 이제 그만 울어라. 타고난 사주팔자가 네 탓이겠냐. 하루만 더 참았다가 나와도 호랭이는 피했을 낀데.”
한 번은 예상보다 일찍 퇴근한 엄마가 외할머니의 말을 듣고 말았다.
“어린 애를 앉혀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화가 난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 목소리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느꼈다. 무너진 성터 위에 나 혼자 고립되어 있었고 사방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어둠 속엔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엄마는 그 어두움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구해주었다.
엄마가 나타나면 나는 슬그머니 뒤로 밀려나고 외할머니와 엄마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외할머니는 내가 뭐 없는 말을 했느냐며 큰소리를 쳤다. 엄마는 아직 철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할 소리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싸움이 오래가는 법은 없었다. 두 사람이 머리채라고 움켜잡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까지 가게 되면 엄마가 결정타를 날렸다.
“엄마도 고란살이 끼었으면서.”
그 한마디에 외할머니는 꿰매어 놓은 쌀자루처럼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흘리지 않았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고 난 밤에는 좁은 방안에 어둠이 강물처럼 흘렀다.
우리 집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일산동 언덕배기였는데 파도 소리대신 강물 소리가 들리는 것은 참 신기했다. 글 : 김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