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22)]핵 확산 아마겟돈 위기에 다시 빠질 것인가?

2025-04-04     경상일보

필자는 35년 4개월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2015년 초 유럽국장이라는 신세계를 접하기 전까지는 줄곧 군축과 비확산 그리고 안보 이슈를 다뤘다. 첫 해외 출장지는 1990년 스위스 제네바였는데, 5년마다 열리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제4차 평가회의 참석을 위해서였다.

주니어 외교관으로서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핵비확산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회의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한 사람들, 그것도 고위급 대표단을 가까이서 접해 보았기에 신기하기도 했고 호기심도 발동했다. 가까이 다가가 말이라도 붙여볼 요령이었는데 그들의 손사랫짓 거부로 여의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북한은 IAEA와 NPT 당사국이면서도 조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우리와 우방국들은 한 달 내내 대북 압박 공세를 드높였다. 그 후 5년이 지난 1995년, 국제사회는 핵 군축과 핵 비확산을 담보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도모하자는 취지의 NPT 조약을 영구적으로 연장해 주기로 결정했다. 1970년 NPT 출범 당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에 대한 핵무기 보유 특권도 영구화해 준 것이다.

그 배경에는 NPT 발효 이후 25년 동안 이스라엘과 인도만으로 한정되는 핵 비확산 성과가 있었고, 또한 그즈음 진지하게 진행된 미국과 소련 간 핵무기 감축 열의를 평가했기 때문이다.

20세기 말 냉전체제 붕괴를 지켜보면서 국제사회는 지구상에서 핵무기가 완전히 사라져 ‘넷제로(Net Nuclear Zero)’의 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았다. 그런데 핵 시계는 거꾸로 흘러갔다. 1998년 파키스탄과 인도는 핵실험을 한꺼번에 여러차례 감행했고 2006년 10월부터 북한도 가세했다.

오늘 현재 핵실험을 거쳐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있는 국가 수는 아홉이다. 핵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는 이란의 동참을 막지 못한다면 우후죽순처럼 이곳저곳에서 발생할 핵 도미노 현상을 보고만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55년 전, 핵무기 전량을 언젠가는 폐기하기로 공약했던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은 포기 대신에 핵억지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이들은 자국의 안보에 치명적 위해가 생기면 언제든지 사용하겠다는 으름장을 거세게 하고 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핵무기 비보유국들은 유엔총회를 통해 핵무기금지조약(TPNW: Treaty on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을 채택했고 2021년 1월 발효시켰다. 핵보유국들은 모른 척 일관하고 있고, 미국의 핵우산 피보호 국가들인 NATO 회원국, 한국, 일본은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대량살상무기(WMD)의 하나인 화학무기의 경우는 시작부터 달랐다.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은 화학무기 보유국들의 주도적인 참여 속에 1997년 채택됐고, 폐기 의무도 성실하게 지켜졌다. 그때와 비교하자면 핵무기 금지의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최근 폴란드 투스크 총리는 핵 세계의 근간을 흔들만한 두 가지 사실을 언급했다. 하나는 EU가 미국 대신 프랑스의 핵우산 보호를 받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를 비재래식 무기로 현대화시키겠다는 의사였다. “군사력 증강이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안보를 담보하기 위한 경주”라는 사족을 달긴 했지만, 유럽 국가가 핵무장을 시도할 수 있다는 발상이라 위험한 것이다. 투스크 총리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역임했었기 때문에, EU 내 현재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무게가 간단치 않다.

재취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NATO 국가들의 안보 무임승차를 맹비난하면서, EU 국가들이 GDP의 5% 이상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NATO를 떠날 수도, 핵우산을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EU로서는 자위권 차원에서 고육지책을 모색 중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폴란드 총리의 공공연한 핵 개발 언급은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핵 비확산 규범을 위반해 핵무기를 개발했거나 개발 중인 국가들을 우리는 ‘불량국가(Rogue State)’ 또는 ‘테러국가’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국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폴란드는 유엔 회원국이자 NPT 당사국이면서 NATO와 EU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은밀하게 핵무기를 개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의 이단아라는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찍힌 가운데 홀로서기를 해야 할 터인데, 핵무장 인프라 구축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국제사회와의 상호 의존도가 크면 클수록 그 한계는 더 높을 것이다.

올해 1월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을 ‘핵확산 민감국가’ 리스트에 올렸다. 북한, 이란과 같은 치욕의 낙인을 찍은 것이다. 우리는 과거 한때 주한미군 철수와 미국의 핵우산 철회 위기 속에서 핵 개발을 시도했던 전례가 있다. 연구실 차원의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또 다른 작은 해프닝을 일으킨 적도 있다. 그렇다 해도, NPT 체제 모범국가이고 맹방인 우리에게 대할 대접으로는 바르지도, 합당하지도 않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핵 주권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긴 해도, 북한의 군사 위협에 대항하고자 결속을 다지는 맥락에서 봐야 한다. 북한에는 핵무기 포기를,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한반도 비핵화 실현 외에 딴생각을 갖지 말 것을 경고하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의 핵무장이 진정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큰일이다. 미국의 핵우산은 세계 평화를 위한 공공재이고, 패권국가로서 공공재를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미국 정부가 ‘킨들버거 함정 (Kindleberger Trap)’과 무한 핵 경쟁의 아마겟돈을 피하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다.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