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의 초록지문(16)]부름켜

2025-04-09     경상일보

이보다 몽환적인 풍경이 또 있을까. 연둣빛에 점령당한 저수지라니.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과 갓난 잎들이 어우러져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나무들이 수면에 비친 모습까지 더해져 눈앞의 풍경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빗소리와 함께 걸으며 “어머, 참 좋아.” 감탄이 저절로 터졌다.

1900년대 초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반곡지는 오래된 왕버들(사진)의 반영(反影)으로 유명하다. 한동안 사진작가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던 숨은 명소였지만 이제는 제법 알려져 방문객도 많다. 저수지를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남기는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발목을 잡는다. 고목은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새잎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무는 죽는 순간까지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 해마다 세포를 분열시키며 줄기와 가지, 뿌리를 확장한다. 키를 키우고 새싹을 내는 일은 생장점이, 줄기와 뿌리의 굵기를 늘이는 역할은 부름켜가 한다. 수피와 목질부 사이에 있는 부름켜는 안쪽으로 물관을, 바깥쪽으로는 체관을 만든다.

이 섬세한 세포층이 나무의 생존과 성장을 책임지는 중심이며, 그 증거가 나이테다. 수령이 300년쯤 된 나무의 몸속에는 수백 번의 겨울과 봄이 기록되어 있다. 가뭄이나 폭우와 같은 기후 변화부터 전쟁과 산불, 병충해까지 온갖 흔적이 새겨진 역사서다. 부름켜가 단단히 제 일을 하기에 생장점은 해마다 키를 키우고 잎을 낼 수 있다. 노목이 올해 틔운 연두색 잎은 올봄에 새로 쓴 일기와 같다.

늘어진 둥치를 쓰다듬어 나무를 읽는다. 겨우내 움직임을 멈추고 견뎠을 인내를 본다. 거칠고 늘어진 수피 아래에 생을 이어온 자부심이 담겨 있다. 내 삶은 나무와 다를까. 나 역시 침잠과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상처와 경험이 쌓이며 매일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봄이 오고 새잎이 자라기를.

봄은 이렇게 느닷없이 시작되는 법이지.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하루를 차곡차곡 부름켜에 쌓아야겠다. 내 안의 생장점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까.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