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에 얽힌 이야기]영겁의 세월…희로애락을 함께한 마음의 안식처
본보는 올해 4월부터 새로운 기획시리즈 ‘영남알프스에 얽힌 이야기’를 매월 한차례 씩 연재합니다.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신불산, 백운산, 간월산, 영축산, 천황산, 재약산, 운문산 등 이들 8개 산의 등산길을 따라 산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등을 백승휘 소설가의 깊이있고 맛깔나는 글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의 인내천 사상을 이어받은 씨알 함석헌 선생은 이곳 부로산 바위에 ‘人乃天’을 새겼다. 그걸 머리맡에 둔 작괘천은 물빛도 고와서 곳곳에 아기 궁둥이같이 희고 보드라운 돌들을 부려놓았다. 지금은 야영장으로 꾸며 지자체의 살림에 일익을 담당하고 지역 주민의 정서적 쉼터로 자리매김했지만, 옛날엔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시풍을 자랑했다.
이곳을 끼고 오르면 온천으로 유명했던 등억마을이 나온다. 등억이란 등허리가 굽었다 하여 붙여진 지형을 한자를 빌려 표현한 것인데, 즐비하게 층층으로 들어선 서양식 건물이 말해 주듯이 한때 온천단지로 꽤 유명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폭포골, 누운등, 성지골은 늦은 봄에도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산그늘이 져 사람 발길을 쉬 허용하지 않던 험지였다.
신불산 홍류폭포로 길을 잡은 갈림길에서 오른편 길로 방향을 잡아 오르면 삼성SDI 직원들이 만들었다는 철다리가 나오고 계곡 찬물을 이용해 시원한 막걸리를 파는 산속 주점이 있었다. 산객들에겐 오다가다 한 번쯤 쉬며 땀을 식히는 정자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 집목재 장소로 쓰여 빼앗긴 땅에서 산채로 도려낸 나무를 죄다 모아놓은 곳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다시 발길을 재촉해 서둘러 오르면 대뜸 보기에도 명당임을 짐작게 하는 곳이 나오는데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꽤 연륜이 든 소나무가 지키고 있는 동래 정씨 묘 터다. 동래 정씨 묘가 들어서기 이전 옛날엔 절간이 있었다고 하여 ‘절터꾸미’라 불렀다. 지금은 동래 정씨의 커다란 묘가 절터를 대신해 차지하고 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를 버리고 비탈진 길을 허위허위 오르면 곧 후려치며 날 것 같은 기세로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웅장한 간월공룡능선을 보게 된다. 수직으로 거칠게 곧추 깎아 세운 바위가 천년만년 세월을 아랑곳하지 않고 굽 죄지 않은 채 서 있다는 게 경이롭다. 임도로 다시 돌아와 백 년 약수터라 불리는 바위에 머물러 석간수 한 모금을 입에 담는다. 물 한 모금에 십 년 젊어진다는 속설에 걸맞게 바위를 뚫고 힘겹게 나오는 물맛은 일품이다. 아마 저 밑 등억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들이 걷는 수고로움을 이 석간수는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 시름을 놓을 만한 이쯤에서 목 좀 축여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간월재 휴게소다. 간월재 휴게소에서 파는 라면 하나 먹자고 저 아래 임도를 따라 사람들은 이곳까지 오른다. 이게 여기서는 별미 중의 별미다. 한겨울 눈 쌓인 신불산을 넘은 산객의 언 손과 목구멍에 라면 국물이 들어가는 순간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그러니 사람들은 부러 이곳을 찾는다.
왕뱅이만디를 차고 오르는 바람은 차다. 밑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몰아치는 바람은 종잡을 수 없는 난봉꾼 소매처럼 한곳으로 몰렸다가 이리저리 부딪치며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바람을 등지면 맞바람이 옷섶을 파고들고, 그 바람을 맞지 않으려 뒤돌아서면 좀 전 바람이 목덜미를 치는데 같은 바람이라도 방향에 따라 앙칼지고 야멸차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
아직도 오지로 남았다고 하는 왕봉골로 와랑와랑 대며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가 크다. 이 물은 흘러 흘러 그 깊다는 심연의 파래소 폭포에 닿는다. 한때는 빨치산들의 해방구였던 곳이다. 지금은 임도가 들어서 옛길을 찾을 수 없지만,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면 닿는 곳이 파래소 폭포고, 그곳은 빨치산들이 식량을 나눠 먹던 자리다. 임도 길 따라 걷게 되면 보이는 절벽 끝에 난 험지는 왕봉골을 통해 들어 오는 군경토벌대들의 기습을 살피기 위한 빨치산 초병들이 있던 망루다. 한 손을 양미간에 대고 벼룻길에 서서 보면 저 길에서 기어 오는 개미조차 훤히 다 보일 정도다. 이런 천혜 장소에 빨치산들이 둥지를 틀었으니 토벌대들이 함부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빨치산들만 이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왕봉골 옛길을 더는 찾을 수 없는 대신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천주교 성지 ‘대재공소’라 쓴 비석이 보이고, 그 비석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 들어 바라보면 음숭하게 깊게 팬 큰 굴 하나를 볼 수 있는데, 죽림굴이다. 이 굴은 무수히 많은 산죽 나무로 덮여 있었다 해서 죽림굴로 불렸지만, 단순히 산죽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서 그렇게 부르기엔 아픈 역사가 굴 곳곳 깊게 배어있다.
서학으로서 들어 온 천주교가 ‘천좍’이라는 사교로 극단 배척당하면서 여파가 언양까지 미쳐 울산 장대로 끌려가 참수당한 천주교 신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간월산, 신불산으로 피난하였고 그렇게 피신한 그들을 보듬어 주고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해준 곳이 이 죽림굴이다. 150명 가량이 숨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배를 보았다고 하기엔 굴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한국판 까따꼼베(석굴공소)라 하여 국내 유일이 암굴 성소임을 밝히려는 여러 성물이 관심을 보이는 몇몇 객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뿐이다.
어디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다고 한들 이곳만큼 종교와 이념이 깊게 스며든 곳은 없으리라. 다 목숨 부지하여 살자고 매달린 종교와 이념이었지만 산목숨이 한때 죽은 목숨을 부러워할 정도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곳이 이곳이었다. 이젠 흙으로 돌아간 시간이며 우린 조용히 그 시간을 묻어줘야 할 때다. 글=백승휘 소설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