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 연재소설]고란살[4] - 글 : 김태환

2025-04-24     차형석 기자

외할머니는 열아홉 나이에 시집을 갔다. 친정집이 울산 방어진 화암이었는데 시내의 부잣집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첫 딸인 엄마를 낳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남편을 잃었다. 나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그분은 전쟁에 나가 백마고지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졸지에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 되고만 외할머니는 어린 딸을 데리고 방어진 친정으로 돌아와 홀로 물질을 하며 살았다. 나는 지금도 외할머니가 생각날 때면 슬도 바닷가에 나가 방파제를 걷는다. 어릴 적 나에게 모진 말을 하긴 했지만 인정이 넘치던 분이었다.

“너는 함부로 눈물을 찔찔 흘리며 살몬 안 된데이. 사내들보다 더 억세게 살아야 된데이. 알긋나?”

방파제 옆구리를 들이치는 파도 소리에 외할머니의 숨비소리가 섞여 있었다. 방어진 앞바다에서 물질로 딸 하나를 키운 외할머니의 눈엔 허연 소금서리가 끼어 있었다. 싱거운 눈물 따위는 일찌감치 말라 있었다.

그런 소금서리가 버석버석한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린 것은 사위를 먼 바다로 보내고 나서였을 것이다. 내가 돌잔치를 치른 다음 달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나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애비를 잡아먹은 년이 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고란살’이 낀 년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은 엄마였다. 아버지의 사망은 엄마에게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 되고 만 것이었다.

엄마는 외할머니만큼이나 억척스러웠다. 본가에서 나를 데리고 나온 엄마는 현대중공업에 들어가 용접일을 했다. 여자로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남의 집 사랑방을 벗어나 집도 장만했다. 볕이 잘 드는 일산동 언덕배기에 삼대 모녀가 사는 쌍 과붓집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의 억척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유치원시절부터 부잣집 아이 못지않게 누릴 걸 누리며 자랐다. 유치원부터 피아노를 배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원에 다녔다. 음악을 전공할까 여러 번 망설이기도 했는데, 결론은 내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꿈은 내가 세상에서 주목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너끈하게 생을 살아가는 단단한 여자가 되기를 바랐다. 글 : 김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