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6주년]“성장하는 학생 모습에 다시 일어설 힘 얻어”

2025-05-15     이다예

경상일보가 만난 올해의 선생님

잊지 못할 ‘은사’가 있는가. 돌이켜보면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은 20여 년 전, 풍성한 곱슬머리에 표범무늬 바지를 입고 나타난 한 사람에게서 배웠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그는 반장이 되면 반 전체에 돌려야 했던 햄버거 간식을 없앴다. 공책에 필기하는 대신 스케치북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운동장에서 철가루를 모으며 친구들과 실컷 노는 것의 의미를 알려줬다.

30대 직장인이 된 지금, 삶이 무거워질 때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처음 열어준 은사의 이름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본다.

여기,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또 다른 교사들이 있다. 제44회 스승의날 정부포상을 받는 김인주 야음초등학교 교장(홍조근정훈장), 전광조 성동초등학교 교장(대통령표창), 이경원 옥현중학교 교장(대통령표창)이 주인공이다. 5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교정에서 ‘올해의 선생님’을 만났다.

◇서툴렀지만 가르침 만큼은 진심

수십 년 교직에 몸담은 이들에게도 낯설고 서툴렀던 초임 교사 시절이 있었다. 전광조 교장은 1990년 울산 신명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변변한 교육 시설 하나 없던 어촌 마을에서 청년 교사는 곧 동네 구심점이 됐다. 여가 시간에는 아이들과 신나게 축구를 하다가도 수업 시간에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숙제를 못해 혼날까봐 학교에 오지 않은 아이를 애타게 찾으러 다녔던 날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전 교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염포초등학교에서 여자 배구를 지도할 때 만난 김해란 학생을 꼽았다. 국내 여자 배구 전설이 된 김해란 선수다. 그는 “당시 주장이던 해란이는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며 “훗날 해란이가 런던올림픽 4강 주역이 되고, 흥국생명 주장을 맡아 경기장을 누비는 모습을 봤을 때 뭉클했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이경원 교장의 노래방 애창곡은 첫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팝송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다. 아이들과 빨리 친해지기 위해 통기타를 배워서 직접 연주까지 한 젊은 날이었다. 지금도 이 팝송을 들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이 교장에게도 애틋한 사제지간이 있다. 학급에서 솔선수범하던 고등학생 제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했다.



◇스승에게도 스승이 있는 법

참된 스승은 수많은 제자를 남겼고, 그 제자는 시간이 흘러 좋은 선생이 됐다. 김인주 교장의 멘토는 한숙자 전 울산강남교육지원청 교육장이다. 퇴임 후에도 공교육 내실화와 사교육비 절감, 돌봄에 애썼던 한숙자 전 교육장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육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한숙자 선생님은 열심히 뛰어다니시느라 단화 뒷굽이 늘 닳아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라고 강조했다.

전광조 교장의 은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적 우수자가 된 자신에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두식 선생이다. 그는 “은사의 관심과 칭찬을 계기로 공부에 더 정진할 수 있었다. 선생님처럼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학생 개개인의 장점을 찾아 격려하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이경원 교장은 곤란한 상황에서 따뜻하게 위로해 줬던 중학교 시절 은사가 이따금 그립다.

그는 “육성회비를 늦게 냈다는 이유로 교실 밖에서 벌을 받을 때 정말 창피했는데, 미술선생님이 꿀밤 대신 격려의 말을 건네주셨다. 손수건에 선생님 존함을 새겨 선물로 드리고 부끄러워하던 제자를, 진심으로 예뻐해 주셨다”고 회상했다.



◇좋은 학교는 공감·포용에서 출발

요즘 학교 현장은 교권 침해와 학교폭력 등으로 어느 때보다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들이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탓이다. 교사의 지도는 신뢰를 잃어가고, 한때 존경의 상징이던 스승이라는 말도 이제는 그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이들은 “교권이 약화되고, 학생과 학부모 인식도 달라지면서 교사가 교육에 전념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선생님들은 교육보다 학부모 민원 때문에 ‘문제 없이 하루를 넘기는 것’에 집중해야 할 만큼 트라우마가 심각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청주 흉기 난동 사건 등 사회적으로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학교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이런 현실이 선생님들에게 큰 상실감과 무력감을 안겨주고, 교육의 본질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좋은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들은 “좋은 학교는 제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주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용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어 “교사의 교육활동 보호와 정서 지원, 전문인력 확충 같은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 학생은 타인을 존중하고 책임감을 배우며, 교사는 전문성과 따뜻함을 갖추고, 학부모는 학교와 협력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사들에게 존경과 응원의 박수

“지치고 흔들릴 때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럴 때일수록 왜 교사가 되기로 했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세요.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도 잊지 마세요. 건강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건강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맑은 눈빛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작은 성장에도 함께 기뻐하며 보람을 느끼는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자입니다. 열정과 사랑으로 가르치는 여러분의 헌신이 세상을 더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들 것입니다.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학습지도, 생활지도, 자기계발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선생님들 존경합니다. 모두 폭삭 속았수다!”

선배 교사인 이들은 학생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후배 교사들에게 무한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인주 교장은 “부정적인 평가와 불신은 내려두고, 이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으로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전광조 교장은 “학생과 학교, 지역에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늘 고민해왔다. 동료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교사의 지혜”라고 조언했다.

이경원 교장은 “올해 8월 퇴직을 앞두고 있어 이번 스승의날은 더 특별하다. 교사였기에 기억할 제자들이 있고, 그래서 교직에 있었던 것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이다예기자 ties@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