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문화전(文畵展)]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는 ‘차이를 보는 관점’에서 출발
인간이 감관을 통해 대상과 세계를 만날 때, 대면하는 최초의 사태는 ‘특징을 지닌 차이들’이다. 인간, 동식물, 소리, 냄새, 맛, 감촉 등을 만날 때, 그 최초의 대상은 ‘구분되는 차이들’이다. ‘한국 사람’ ‘프랑스 사람’ ‘여성’ ‘남성’ 등으로 차이가 구분되는 사람을 만나고, ‘큰 소리’ ‘작은 소리’ ‘향기’ ‘악취’ 등 차이를 보이는 소리와 냄새를 만난다. 생물도 마찬가지다. 다만 생물이 만나는 차이들은 오직 생물학적 감각 기관을 통해 구분된 것들이지만, 인간이 만나는 차이들은 ‘언어에 담아 분류한 차이들’이 추가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이 만나는 차이들은 모두 ‘언어라는 그물에 의해 걸러진 것들’이다. 언어와 연루되는 정도와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인간은 생각도 대상으로 삼는다.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등 ‘언어로 분류한 정신 현상의 차이들’을 만난다.
아있는 인간과 생물의 경험은, 단지 ‘구분되는 차이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차이들의 대비(對比)’를 통해서 비로소 모든 경험이 발생한다. ‘큰 소리’는 ‘크지 않은 소리’와 비교되어야 ‘큰 소리라는 경험’이 생겨난다. 생물의 경험은 감각 기관을 통해 구분된 차이에 대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지각 경험’이다.
이에 비해 인간의 경험은 언어로 구분된 차이에 대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인지 경험’이라 부를 수 있다. 지각 경험이든 인지 경험이든, 차이가 ‘발생의 초기조건’이고 ‘차이들의 대비’가 ‘경험의 발생 구조’다. 인간의 그 어떤 생각이나 관점, 감정이나 욕구, 경험도 ‘그것 아닌 것들과의 대비’에서 발생한다. ‘행복하다’라는 경험은 ‘행복하지 않은 경험’에 기대어 발생한다. 그 어떤 경험도 ‘그것과는 다른 경험들’ 때문에 생겨난다. ‘모든 경험’은 ‘그것 아닌 것들’에 기대어 있다.
해탈·열반·깨달음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해탈 경험은 속박 경험과 비교되어야만 발생한다. 열반 경험은 ‘불안과 동요 경험’과 대비되어야 이루어진다. 깨달음 경험은 ‘무지의 어두움’과 비교되어야 체험된다. 해탈·열반·깨달음이라 칭하는 경험은 ‘해탈·열반·깨달음이 아닌 것들에 기대는 동거 구조’에서 생겨난다. ‘오직 자유’ ‘오직 평안’ ‘오직 깨달음’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수·절대의 경지는 본래 불가능하다. ‘그것 아닌 것’이 모조리 삭제된 순수·절대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경험 발생의 조건들(연기)에 대한 무지다. 모든 악이 없다면 모든 선도 없다.
이처럼 생명체의 모든 경험은 ‘특징을 지닌 차이와의 만남’에서 시작하고, ‘차이들의 대비’를 통해 내용이 발생한다. 그리고 ‘특징을 지닌 차이에 대한 대응’이 생명체의 삶을 만들어 간다. 동식물의 경우 그 대응은 이미 주어진 생물학적 본능에 따르기 때문에 단순하다. 생존에 이로움을 주는 차이에는 긍정 방식, 그 반대의 경우는 부정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로움을 주는 데도 부정 반응을 취하거나 해로움을 주는 데도 긍정 반응을 택하는 경우는 목격하기가 어렵다.
인간은 특이하다. 차이들에 대한 대응 방식이 단순하지 않고 선택의 폭이 넓다. 이로움을 주는 차이에도 부정 방식을 취하는가 하면, 해로움을 주는 차이에도 긍정 방식을 택한다. 이로움을 보는 관점이 다채롭기 때문이다. 자신을 해치는 적을 사랑과 자애로 대응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차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이 이처럼 특이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능력 및 그에 수반하여 발달한 이해 능력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차이들의 얽힘’이고, ‘차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해 능력을 지녔기에 ‘차이/특징들에 대한 관점’에 따라 삶과 세상의 내용을 수립한다.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는 ‘차이를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차이를 보는 관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거나 외면하는 가르침과 이론은 공허하거나 자칫 기만적이다. 삶과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그 어떤 이론과 실천도 ‘차이를 보는 관점의 문제’를 기준선으로 삼아야 한다.
랍게도 붓다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관통하는 것은, ‘차이/특징(相, nimitta)에 대한 인간의 시선’과 ‘차이/특징들과의 관계 방식’에 관한 통찰이다. 그 통찰의 내용은 근원적이고도 현실적이다. 붓다의 길은, ‘차이(相)들에 대한 시선’과 ‘차이들과의 관계 방식’에 대한 성찰과 대응의 문제로 채워진다고 볼 수 있다. ‘생사로부터의 해탈’도 ‘죽음에 대한 삶의 영원한 승리’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차이에 대한 시선 및 이 차이와 관계 맺는 방식과 능력의 문제로 보는 것이 불교적 사유에 부합한다.
흥미롭게도 한반도 전통 지성의 거봉 원효(617~686)는 ‘차이들의 열린 화해와 호혜적 어울림’(通攝)을 위한 통찰을 정밀하게 펼치고 있다. 불교 교학을 ‘차이(相)에 관한 성찰’과 ‘차이 화해의 방법론’(和諍)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효는 붓다의 정통 계승자로 평가할 수 있다. 원효의 평생 탐구는, ‘왜곡·오염되어 부당하게 차별된 차이’와 ‘그 해로움’ 및 ‘제대로 이해된 사실 그대로의 차이’와 ‘그 이로움’에 관한 통섭 통찰로 귀결되고 있다. 원효가 안내하는 삶의 길은, 차이들을 외면하거나 초월하는 길이 아니라, 차이를 보는 관점을 ‘사실 그대로’에 맞게끔 바꾸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우리의 발길을 결정하는 ‘차이들을 보는 관점’을 얼마나 온전한가?
글=박태원 인제대 석좌교수·화쟁인문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