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열의 고용노동 이슈(27)]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과 기업의 노동생산성

2025-05-23     경상일보

한국의 노동시간 제도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균질화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85시간으로, 여전히 OECD 평균인 1716시간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장시간 노동이 아니라, 획일적 규제 구조에 있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면서, 반도체·AI·바이오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선 집중적이고 유연한 시간 운용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산업은 주기적으로 몰입형 노동이 필요하며, 일률적 시간 규제는 오히려 경쟁국 대비 신속한 전략 실행과 기술 대응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해외 주요 경쟁국들은 이미 고소득·고숙련 전문직에 대해 근로시간 제한을 유연화하고 있다. 미국은 연방 노동기준법에서 연봉 기준을 충족하는 전문직에 대해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적용해 초과근로수당 규제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일본은 2019년 도입한 고도프로페셔널 제도를 통해 연봉 1075만엔 이상 고숙련 직무자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면제하고 있다. 이는 시간의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고숙련 인력이 자신의 창의성과 몰입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혁신 산업과의 궁합이 탁월하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AI, 스타트업, 디자인·크리에이티브 등 몰입형 노동이 요구되는 영역에서도 주 52시간제를 획일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는 R&D, 설계, 긴급 프로젝트가 일상화된 산업에서 탄력적 근무와 고성과 중심의 시간 운영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국내 반도체 기업은 대만 TSMC의 3교대 R&D 팀 운영, 미국 NVIDIA의 자율근무 기반 몰입형 혁신 문화 등과 비교할 때, 제도 기반에서 글로벌 경쟁력의 발목이 잡힌다는 지적이 많다. 이제 한국도 산업별·직무별 특성을 고려한 화이트칼라 유연근로제 도입을 검토할 시점이며, 그 핵심은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자율성과 책임이 조화를 이루는 제도적 설계에 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는 고소득 전문직 또는 관리직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면제하는 제도로, 업무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기반으로 성과 중심 문화를 조성하는 제도적 장치다. 미국은 2024년부터 연 소득 10만7432달러(약 1억4000만원) 이상인 고소득 근로자에게 이 제도를 적용하고 있으며, 법정근로시간이나 초과근로수당 지급 의무에서 제외되는 대신 성과에 기반한 보상과 평가가 핵심이 된다. 이는 단순히 노동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군의 몰입형 업무환경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는 데에 핵심 의의가 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가 창출하는 효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근로시간보다는 성과에 따라 평가·보상이 이뤄져 자율성과 책임감이 동시에 증진된다. 둘째, 프로젝트 기반 집중 근무가 가능해져 R&D나 제품 출시 직전의 몰입기가 필요한 기업에게는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의 기반이 된다. 셋째, 자율성과 유연성을 중시하는 고숙련 인재를 유치·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는 기업의 장기 경쟁력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테크기업 다수는 이 제도를 바탕으로 고성과 인재를 확보하고 있으며, 근무시간보다 일의 완성도와 창의성에 무게를 두는 조직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스타트업에게 있어 시간은 곧 생존이다. 창업 2~3년 차 기업은 제품·서비스의 시장 검증과 자금 유입 속도가 사업의 명운을 결정하며, 이 시기의 업무는 예측 불가능성과 고강도 몰입이 반복된다. 소수 인력이 다수 역할을 감당하고, 야간·주말 근무가 프로젝트 마감이나 투자 유치 준비 과정에서 빈번히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행 근로시간 제도는 이러한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경직된 틀을 유지하고 있다. 특별연장근로 인가나 탄력근로제 활용은 요건이 까다롭고 행정적 부담이 커, 민첩한 사업운영이 필수인 스타트업에는 실질적인 제약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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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스타트업 근로자는 전통 제조업과는 다른 동기구조를 갖는다. 고정급보다 스톡옵션, 기업 성장에 따른 보상 등 성과 중심 인센티브가 주요 유인이다. 이들은 단순히 시간을 팔기 위한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의 성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책임 있는 동료이자 창조자이다. 자율적으로 몰입형 근무를 선택하는 경향이 크며, 실제로 실리콘밸리나 텔아비브의 스타트업들은 이 같은 고밀도 근무 문화를 혁신의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는 이 같은 스타트업의 현실과 문화를 제도적으로 정당화하고 보호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무제한 근무를 허용하는 수단이 아니라, 고소득·고책임 전문직에 대해 자율적 근로시간 설계를 인정하고, 성과 중심의 유연노동 생태계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스타트업의 생존은 유연성에 있고, 유연성의 제도화 없이는 책임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한국 역시 스타트업과 혁신기업의 특수성을 반영한 근로시간 유예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이라는 명확한 틀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로 정당화’가 아닌 ‘성과와 책임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한국생산성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