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 연재소설]고란살(12·끝)글 : 김태환
나는 묵암스님의 업장 소멸이라는 말에 마음이 꽂혔다.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고란살이라는 말이 은연중에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에비 잡아먹은 년은 잊혀졌다. 하지만 서방 잡아먹을 년이 어디에선가 잔뜩 웅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친정엄마가 기를 쓰고 동축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닌 것도 알고 보면 삼 대에 걸쳐 내려온 고란살 때문이었다.
“스님 정말 운명을 바꾸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걸 바꾸지 못한다면 불도가 무슨 소용이고 불법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는 갑자기 죽은 김 과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나 나의 고란살이 남편이 아닌 김 과장에게 미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사람뿐 아니라 남아 있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김 과장은 입사 동기였다. 나이도 같았고 학교도 같은 동문이었다. 일에 있어서는 제일 가까운 파트너였고 라이벌이었다.
사고가 있던 날 나의 승진보다는 그의 탈락이 더 마음을 짓눌렀었다. 진정으로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다. 늦은 시간은 문제되지 않았다. 김 과장은 남편의 의심을 살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스님 나의 고란살이 엉뚱한 사람을 죽게 한 것이 아닌지요?”
“사람의 운명은 우리가 모두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업장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나를 낮추어 중생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면 모든 업장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사고가 한밤중에 일어났는데 저의 결백을 믿어주시겠는지요? 더구나 호텔 바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묵암 스님은 나의 질문에 너털웃음을 웃었다.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지요. 어느 바보 같은 여인이 남편이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 밤중까지 술을 마시겠습니까. 우리 애기보살님은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한 것이지요. 밤을 새우고 가도 나는 떳떳하다는 자신감이 넘쳤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생각을 해보세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은 왜 생겨났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자신감은 좀 감추시고 항상 낮추며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스님 앞에서 합장했다. 화가 잔뜩 나 있던 남편은 걱정할 게 못 되는 것 같았다. 죽은 김 과장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거액의 보험은 왜 들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퇴원하면 미망인이 된 그의 부인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동축사 대웅전 앞의 홍매화가 떠올랐다. 추위가 누그러들기 시작했으니 지금쯤 홍매화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렸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