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면주칼럼]풀이 먼저 눕는 계절
유월의 바람에 일렁이는 풀을 바라보면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는 시구가 떠오른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는 구절로 유명한 김수영의 시 ‘풀’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거대 권력의 횡포 앞에 무력한 지식인들이 스스로 풀이라며 선술집에서 많이 암송하던 시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여당이 국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한 경우는 유신체제의 박정희 정권과 3당 합당 후의 노태우 정권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의 지속을 위한 통치력 확보를 명분으로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고, 유정회 국회의원 73명을 대통령이 추천하도록 해 권력을 대통령에게로 집중했다. 이 체재는 경제개발의 지속 등 일부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으나, 결국 야당 탄압과 민주주의 말살로 이어져 부마사태, 대통령 시해 등으로 붕괴했다. 6·29 선언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3당이 합당해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의 공세를 잠재우고 급속히 국정을 안정화하고 국방 외교의 성공으로 차기 김영상 정부를 탄생시켰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같은 계열의 정당을 합한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으로 입법권을 장악했다. 윤석열 정권에 맞서 거부권과 탄핵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시대착오적인 계엄령을 선포한 윤 대통령이 파면됐다. 이후의 대선에서 같은 당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돼 입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거대 좌파 여당이 탄생했다.
국가권력은 좌파 세력으로 급속히 집중되고 있다. 유신과 3당 합당에 의한 권력의 집중은 국민의 선택이 아닌 인위적인 요인에 의한 우파의 결집이었다. 이번 거대 여당의 출현은 국민의 선택이라는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고, 이념 중심의 좌파 권력 집중이라는 점에서 그 바람의 파괴력은 어느 때보다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타석 대통령 탄핵으로 우파 야당은 지리멸렬한 가운데 이번 바람의 강도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렇다 보니 바람이 채 불기도 전에 풀들은 먼저 눕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만개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서 탄생한 거대 여당을 두고 50년 전의 유정회와 김수영의 저항시를 소환하는 것을 지나친 정치 공세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총선 이후 입법권을 장악한 민주당의 행태는 이러한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야당을 배제한 채 법안을 강행처리 하기 위해 상임위와 총회를 부지기수로 파행 운영했다. 대화와 타협은 도외시하고 다수결의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으로 착각했다. 탄핵을 남발하는 등 민주주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입법권의 행사를 부인할 수 없다.
민주 헌정의 기본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도 권력의 집중 앞에는 쉽게 무너진다. 법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되고 야당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거나 무력한 반대 시위 정도로 자족한다면 의회의 기능은 줄어들고 행정부의 뜻이 의회에서 복제되는 거수기로 전락할 뿐이다. 국민의 지지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라는 형식적인 정당성과 다수결의 힘에 안주해 야당과 국민의 목소리를 정치적 방해물로 적대시한다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다수결 제도는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의 한 방법일 뿐 그 자체가 바로 정의가 될 수는 없다. 정의는 다수의 힘이 아니라 윤리와 공공의 이익에 기반한 약자 보호의 수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대 권력의 세찬 바람 앞에 견제 수단인 언론, 사법부, 지식인, 공무원들이 먼저 드러누워 국정의 균형을 잃어버릴까 하는 국민의 우려가 깊어만 간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쟁의 와중에 도외시 됐던 민생경제, 지방소멸, 개헌, 트럼프 리스크, 북한의 핵 문제 등등 국가적 어젠다를 집중된 권력으로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면 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념에 경도된 포플리즘 법안, 사법권을 침해하는 방탄 법안 등을 양산하거나 정치보복, 국회의 일방적인 운영 등으로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 간다면 잠시 누웠던 풀들이 먼저 일어나는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신면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