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건망(健忘)’하는 사회
요즘 들어 건망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방에 왜 들어왔지?” “어제 누구 만났더라?” “회의 주제 뭐였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젊은 직장인도, 엄마도, 학생도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무언가 잊고 사는 느낌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화나 질환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건망증 사회’를 살고 있어요. 이유는 간단하죠. 우리 뇌는 생각보다 용량이 크지 않아요. 정보를 저장하는 ‘장기 기억’이야 무한에 가깝지만, 작업기억(working memory)은 용량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작업기억은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정보를 잠시 저장해두고 처리하는 ‘마음의 메모장’인 것이죠. 컴퓨터로 말하면 RAM에 해당하네요. RAM은 저장장치가 아니라 처리 중인 내용을 잠시 올려두는 임시 기억창고입니다. 요즘 테라급 하드디스크를 쓰는 컴퓨터도, RAM은 고작 8~16기가에 불과하잖아요. 뇌도 마찬가지죠. 엄청난 양의 정보가 장기 기억에 저장되지만, 지금 당장 쓰고 있는 작업기억은 용량이 작죠. 작업기억이 과부하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건망증입니다. 문제는 이 메모장에 너무 많은 생각과 정보가 동시에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걱정, 할 일, 알림창, 문자, 아이 돌보기, 내일 발표 준비…. 작업기억이 처리하기도 전에 다른 정보가 밀고 들어오면 기억은 증발하지 않겠습니까? 집중은 사라지고, 감정은 지치고, 뇌는 멈춥니다. 이 현상이 건망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뇌를 위한 실천 가능한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첫째, 걱정 매는 ‘정해진 시간’에만 맞으세요. 우리는 걱정을 ‘언제든’ 합니다. 하지만 뇌는 걱정도 입력된 정보로 인식하죠. 걱정이 많을수록 작업기억이 빨리 소진됩니다. 그래서 걱정도 시간표를 만들어서 하는 겁니다. 아침 식사 후, 점심 산책 후, 밤 자기 전 중 정해진 10분만 걱정하세요. 이 시간 외에는 “걱정은 나중에”라고 뇌에 말하세요. 걱정 매는 먼저 맞되, 꼭 ‘정해진 시간’에만 맞는 것입니다. 그 외 시간은 걱정을 금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금, 이 순간, 하나의 행위에 집중하세요.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순간, 그 감각에 집중해보세요. 한 발 내디딜 때, 발바닥의 감촉을 의식해보십시오. 이런 단순한 순간에 집중하는 ‘의식적 주의’는 작업기억을 보호해줍니다. 지금 하는 행동에 마음을 집중하면 불필요한 잡생각이 슬쩍 끼어들 틈이 없어요. 생각은 줄고, 순간은 깊어집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은 오히려 길어지고, 뇌는 천천히, 그러나 깊게 작동하게 됩니다. 셋째, 자기 전에 잡생각을 뇌의 휴지통에 버립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오늘 떠오른 걱정과 감정은 여기까지만”이라고 선언해 보십시오. 그리고 상상의 휴지통을 떠올려 그 안에 던져 넣는 것이죠. 실제로 뇌는 수면 중, 감정을 정리하고 기억을 분류하는데 이때 명확한 명령을 주면 무의식이 훨씬 효과적으로 작동한답니다. “오늘 이 감정은 꿈에서 정리해 줘” 이 한마디가 우울, 스트레스, 분노를 부드럽게 정리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전에 1분만, 자신의 무의식에 감정 정리의 일을 맡기는 주문을 거십시오. 수면하는 동안 뇌는 ‘꿈 작업’을 하여 생각과 감정의 찌꺼기를 망각으로 이어지게 해준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회복되지 않는 기억력의 심각한 문제도 있습니다. 여성에서 건망증의 원인으로 이것이 흔합니다. 우울증에 빠지면 인지기능까지 무기력해져 기억력장애를 동반합니다. 남성에서는 최근 AD(주의력 결핍) 문제로서 집중력이 떨어지며 산만해져 잊어버리고 실수가 잦아져 내원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건망증은 단순한 건망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떠안은 뇌의 비명입니다. 뇌는 쉴 틈이 없고, 메모장은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뇌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금 덜 생각하고, 조금 덜 걱정하고, 조금 더 지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체중 다이어트만 할 것이 아니라, 생각의 다이어트도 한다면 깜박 증후군은 없앨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만 걱정하고 이 순간에 집중하며 자기 전에 잡생각을 휴지통에 버리기, 이 세 가지는 건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