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전란사 12]억압받는 민심의 불꽃, 효심(1)
1. 울산 사람, 효심
고려시대 무신정권 때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억압받던 백성들은 견디다 못해 전국적으로 봉기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울산의 초전 사람 효심이다. 최근 초전이 울산이 아니라 밀양이라는 일부 논란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이며, 초전은 분명 울산지역이다. 초전이 울산지역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울산군 역원조의 “초전원(草田院)은 고을 서쪽 64리에 있다”라는 기록을 살피면 알 수 있다.
역(驛)은 관원의 이동 지원, 중앙과 지방 간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 그리고 전세 공납 등 지방의 생산물을 중앙으로 수송하기 위해 설치됐던 교통·통신 시설이다. 원(院)은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로, 공용(公用) 여행자와 상인 및 사용(私用)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했다. 원은 일반적으로 주요 교통로를 따라 분포돼 있었는데, 역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울산지역에도 관원 이동, 공문서 송달, 공공물자의 수송 등을 위한 교통·통신 시설로 역, 원 등의 시설이 설치됐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의 우역을 근간으로 해 22역도(驛道) 525개의 속역 조직으로 정비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을 통해 체계적인 역제(驛制)를 확립했다. 조선 전기에 41역도 543개의 속역 체계로 전국적인 역로망이 완성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울산군에는 간곡역·굴화역·부평역이, 언향현에는 덕천역이 있었다. 간곡역은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에 설치됐던 역참인데, 기장 방면으로 아월역과 연결됐고, 부평역은 병영성 서쪽에 있었는데, 굴화역과 경주 방면 구어역과 연결됐다. 덕천역은 경주 방면으로 잉보역과 양산 방면으로 황산역으로 연결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울산군에는 진동원, 송지원, 대한원, 가수개원, 견분원, 굴화원, 단두원, 대양원, 공계원, 초전원, 공수곶원, 청광원, 고지원, 고원, 태화원, 팔등촌원 등 16원이 있었고. 언양현에는 신원, 저촌원, 우천원, 석남원, 보통원 등이 있었다. 울산지역의 원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폐허가 됐고 다시는 복구되지 않았다. 초전원은 간곡역 옆에 있었다. 실제로 간곡역이 있었던 웅촌면 곡천 마을과 초전원이 있었던 초전 마을은 지금도 교량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2. 울산지역이었던 서창과 덕계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의 서창과 덕계 지역은 1906년(고종 43년) 이전에는 울산군 웅촌면 지역이었다. 웅촌면은 삼국시대에 생서량군의 속현인 우화현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생서량군이 동안군으로 바뀌면서 우화현도 우풍현으로 개칭됐다. 신라 말 하곡현, 동진현과 함께 흥려부로 개편됐고, 991년(성종 10)에는 공화현이 됐다. 1018년(현종 9)에는 공화현이 헌양현·기장현·동래현을 관할하는 울주로 개칭됐다. 조선 태조 때부터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까지 울산군 서면 웅촌리로 편제돼 있었다. 숙종 연간에 서면이 없어지고 울산군 웅촌면으로 전환됐다. 1906년(고종 43) 웅상면을 양산군에 이속하고 웅하면을 웅촌면으로 개편했다.
<호구총수>(울산)와 <여지도서>(울산)에는 웅촌면으로, <영남읍지>(울산)에는 웅상면과 웅하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웅상은 울산읍치에서 더 남쪽에 위치하지만, 소사(小祀)를 지내는 우불산이 있는 곳이어서 웅상이 됐고, 위쪽 마을인 웅촌 지역이 웅하로 변했다. <광여도> 등 군현지도와 <청구도>에도 웅촌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1906년 웅상면이 양산군에 편입되면서, 웅하면은 웅촌면으로 개칭했다.
소사(小祀)는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를 그 경중에 따라 대·중·소 세 등급으로 나눈 가운데서 셋째 등급의 제사를 일컫는 말이다. 신라시대에는 지방의 명산(名山)에 지내던 제사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풍사(風師)·우사(雨師)·뇌신(雷神)·영성(靈星)·마조(馬祖) 등에 지내던 제사였다. 소사를 지낸 곳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데, 울산지역은 우화현에서 지냈다. 우화는 우시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창은 조선시대에 공물을 관리하는 창고가 울산군 서면에 있었을 때 서창(西倉)이라 부른 데서 유래됐다.
3. 효심의 난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몰락을 초래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무신들에 대한 천대는 의종 때 극에 달했다. 무신의 난은 의종 24년인 1170년 음력 8월 30일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채원, 이의민 등에 의해 일어났다. 이 반란의 성공으로 무신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했으며, 많은 문신을 살육했다. 무신정변은 문벌과 문신들의 주도와 무신에 대한 차별에 반기를 든 정변으로, 무신들이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이전부터 고려 사회는 상층으로부터 하층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으며, 무신정변 이후에는 그 변화가 더욱 현저해졌다.
무신정변은 문벌귀족사회를 무너뜨리고 무인들의 통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에 의한 통치는 피지배층의 이해관계와 대립함으로써, 피지배층의 반발을 광범위하게 불러일으켰다. 무인 집권기의 통치자를 비롯한 지배층은 정권 장악·유지에 급급해 피지배층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 개선에 소홀했다. 즉, 이들은 피지배층의 궁핍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대토지 소유에 대한 야욕이다. 이들은 고려 사회의 군현제도의 모순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토지 수탈을 자행했다. 피지배층의 과도한 토지 수탈은 농민들의 생활을 위협했고 농민 계층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2세기 초 이래 토지 겸병에 따른 수취의 증가, 빈번해진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 전란 등은 기근을 불러왔고, 경제적 파탄으로 다수의 유랑민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무신정변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더욱 악화했다.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하급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수탈을 자행해 하층민의 항거와 지배 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이어졌다. 하층민의 봉기는 무신 집권 초부터 30년간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난이 1193년(명종 23) 7월에 일어난 ‘효심의 난’이다.
효심의 난의 발생 배경에는 간곡역과 초전원이 있다. 역원은 주변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는 폐해가 있었는데, 간곡역과 초전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관리를 위한 역둔전과 원전 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로는 과도한 부담은 물론 토지의 관리나 소유 문제 등으로 다툼이 많았다. 특히 원 관리 경비에 대한 부담을 지고 있는 주변 농민들의 불만은 매우 높았다. 효심의 난도 초전원 주변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