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류인채 ‘이끼의 시간’

2025-07-14     경상일보

공터에 버려진 수레 하나
때 절은 손잡이를 치켜들고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있다
싣고 나르던 짐들은 모두 어디에 부렸을까
먼 길을 가던 바퀴가 헐렁해졌다
길과 길을 이어주던 힘이 멈춰있다

눅눅한 때를 건너온 시간의 흔적
푸른 이끼가 기울어진 수레의 바닥을 타고 오른다
저 수레가 걸어온 길을 알 것만 같다
단단하게 조였던 시간이 느슨해지고
길은 이곳에 멈춰있다
해가 구름 사이로 잠깐 들어간 사이
바람이 손잡이를 슬쩍 만지다 간다
그 손에도 이끼가 묻어 있다


이끼의 시간이 굴러가느라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음의 자리, 삶으로 채운 ‘이끼의 시간’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이끼는 늙은 나무에 낀다. 낡은 물받이에 낀다. 오래된 바위나 기왓장에 낀다. 무언가를 덮으며 자라서인지 꽃말이 ‘모성애’인 이끼는 멈춤, 고요, 세월, 그리고 치유와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공터에 수레가 버려져 있다.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싣고 힘들게 굴러다니느라 스스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지쳐서 전봇대에 기대있다. 바퀴는 마모되고 쓸려서 헐겁고 느슨하다. 제 역할을 끝낸 수레는 존재의 의미와 활력을 잃고 널브러져 있다.

그런데 그 멈춘 바퀴에 이끼가 타고 오른다. 이끼는 느리지만 고요히 꾸준히 자란다. 버려진 수레를 덮으며 조금씩 자라는 이끼는 죽은 나무둥치에서 돋는 버섯처럼 죽음의 자리를 삶의 자리로 바꾸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언젠가 저 앙상하고 흐릿한 회색은 둥근 초록으로 바뀔 것이다. 초록의 몸통과 손잡이로 변해갈 것이다.

손잡이를 슬쩍 만지는 바람에도 이끼가 묻어 있다니, 이제 이끼는 주변으로 둥글게 번져간다. 어쩌면 지친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멈춤을 멎고 덜컹거리며 구르는 시간처럼, 계속된다, 이끼의 시간은.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