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이원규 ‘나의 능소화’

2025-07-21     차형석 기자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사랑, 압도적인 필연

봉숭아, 맨드라미, 접시꽃, 배롱나무, 칸나. 여름꽃들은 이글대는 태양을 닮아서인지 붉다. 여름의 허리께쯤 피는 능소화도 노을빛으로 붉다. 작은 트럼펫처럼 생긴 꽃이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피기 시작하면 아, 여름이 무르익어감을 느낀다. 유월부터 팔월까지 능소화는 피고 지고 피고 지며 골목을 붉게 물들인다.

꽃이 아름다워서인지 능소화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소희란 궁녀가 나중에 총애를 잃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서 능소화가 되었다는 전설, 꽃을 만진 뒤 눈을 비비면 눈이 멀게 된다는 진위가 불분명한 이야기, 하늘을 능멸할 정도로 지조 있는 꽃이라 주로 양반집에서 심어서 ‘양반꽃’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 등. 능소화는 ‘화무십일홍’을 비웃듯 오래 피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이다. 이 시는 능소화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를 테마로 눈을 멀게 한다는 능소화처럼 맹목적이고 치명적인 사랑,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능소화가 피어나듯, 우리가 피하려 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어떤 감정을. ‘이쯤은 돼야지’라는 구절의 반복은 거기에 당위성과 비장미를 더해준다.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