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에 얽힌 이야기]다른 산이 따라올 수 없는 서늘한 기운…고려때 민란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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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에 얽힌 이야기]다른 산이 따라올 수 없는 서늘한 기운…고려때 민란 중심지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5.09.22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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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산은 영남알프스의 다른 산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다. 거기다 골이 너무 깊어서 운문산은 암산이란 얘기가 나온다. 운문산 중턱 상운암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전경.
▲ 운문산 정상.
▲ 운문산 중턱에 쌓아놓은 돌무덤.
▲ 운문산 중턱에 자리잡은 상운암.

여름을 알리는 것은 아무래도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열매가 아닌가 싶다. 열매가 열리길 바라는 마음에 본다는 봄과 그리해서 열매를 맺는 여름과 수확의 가실이 변해서 만든 가을도 여름을 겪지 않으면 결코 올 수 없다.

여름과 가을 중간에 열심히 산을 오르는 산객의 머리는 뜨거운 물에 방금 데쳐낸 시금치처럼 후줄근하다. 팔뚝에 차고 오르는 땀을 보건대 ‘소금꽃’이며 그 꽃은 결코 게으른 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석골사로 방향을 잡았다. 마당 한가운데 선 주목은 자기 머리 위로 멀리 운문산을 두었다. 고졸하지 않은 극락전은 팔작지붕을 얹혔고 고요함 빼고는 절간다운 엄숙함 대신 아기자기함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석골사엔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 법사 ‘보양’과 초목을 말라 죽게 한다는 독룡 강철이에 관한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주지는 자기보다 덕망 높은 상좌를 시기하여 강철이로 만들었고 상좌 강철이는 열심히 불도를 닦아 하늘로 오르려고 했으나 옥황상제가 이를 거절하자 그에 앙심을 품고 산천초목을 말려서 죽이려고 가뭄 들게 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강과 바다가 없이 산만 그득한 이곳에 보살 상(像) 하나를 만들어 놓았는데, 2017년 석골사 폭포가 마를 정도로 이곳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이를 보다 못한 석골사 마벽 스님이 부처님 원력으로 가뭄을 극복하고자 세운 해수관음보살 상이다. 서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세웠다지만 혹시 독룡 강철이 되살아날 것을 염려하여 그가 있던 전도 속에 가두려고 감로병을 열어둔 건 아닐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본다.

유독 이 산은 다른 산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한 기암을 품었다. 거기다 골이 너무 깊어서 운문산은 암산이란 얘기가 나온다.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과 까마득한 깊은 골이 있어서 그런지 고려 시대에 들어 이쪽 지역에서 난이 많이 일어났다.

고려 명종(1193년) 때 청도 풍각현을 무대로 일어난 승(僧) ‘김사미’가 이끄는 운문 농민군과 울주 양주 밀성군에서 난을 일으킨 ‘효심’과 농민군은 호응했고, 농민군의 본부는 석남산(가지산), 운문산 등 동남부 산악지대와 대사찰 아래 산악지대에서 활동했다. 그 후 십 년도 안 돼서 일어난 ‘이비·패좌’의 난도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여기다 밀성군 백성들이 진도 삼별초에 호응하여 군수를 죽이고 모반하자 귀화부곡으로 강등했다는 역사 기록으로 볼 때 이 일대는 아무래도 반골 기질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어쨌든 패망한 신라를 그리워하는 고토 세력의 복고적인 명분으로 민란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도태된 민중의 삶이 민란 발생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계림황엽(鷄林黃葉)의 사미와 효심, 곡령청송(鵠嶺靑松)의 사노 만적은 다르지 않으며, 그들 민중은 원과 한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까지 참고 있다가 마지막 콧숨까지 차오르면 그땐 아무도 막지 못하는 들불이 된다.

손바닥만 한 납작납작한 돌이 발부리 놓는 곳에 흔전하게 놓였다. 여기다 도토리거위벌레가 쓸어서 떨어진 참나무 가지가 잔해처럼 도처에 널렸다. 오래돼 썩은 몽둥이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바위를 떠받들고 있지만, 이곳 바위는 워낙 크고 위태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과연 저 몇 개의 나무로 그 힘을 감당해낼까 하는 우매한 질문을 던진다. 또 이곳 산행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산 곳곳엔 천혜의 모습을 숨겼다. 마고할매의 설화가 깃든 ‘정구지 바위’와 그 바위를 돌아 건너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한 곳이 정작 이곳이라는 허준의 ‘제 2 얼음굴’이 있다.

거대한 치마바위를 눈앞에 두고 수리봉을 올려다볼새 없이 오르다 보면 계곡이요, 넘다 보면 바위고, 숲 그늘에 쉬다 보면 온 길조차 보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것이 부처님 자비 가득한 연등이다. 자칫 헤매기 쉬운 길목 곳곳에 산꾼들이 쳐 놓은 리본보다 더 눈에 띄게 걸어 놓았다. 석골사에서 올라올 때부터 보았던 등이 처음엔 ‘어디까지’ 걸어놓았을까? 그 거리가 궁금했는데 운문산 정상까지 걸어놓은 걸 볼 때 거리보단 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이의 공덕에 ‘누굴까’란 긍금증이 들었다.

이런 나의 의문을 해소해준 이는 이곳 상운암을 오랫동안 지키고 계신 지수 스님이다. 무거운 등짐을 메고 오르는 스님께 합장배례하고 말없이 건넨 오이 한 쪼가리로 인연을 텄다. 산객의 눈엔 산정무한이 따로 없는 상운암이지만 길지로서 최고의 기도처였다는 명성은 돌멩이 눈을 가졌어도 한 점 티끌 없이 탁 트인 일망무제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 한철 난다면 한 소식 할 거란 걸 알았던 걸까, 지수 스님은 14세에 순천 송광사에서 출가하여 17세에 해인사와 표충사 행자로 수행하다가 이 상운암에 들었다고 하였다. 상운암과 같은 구름을 둔 광양 백운산 산사람 얘기부터 한다. 많이 죽었다. 앞서 포로로 잡힌 사람이 산사람 은닉지를 지목하면 전날 군경이 그 자리에 숨어 있다가 산사람을 죽였다. 전쟁 통에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마을에서 흔히 듣던 얘기라며 내게 들려준다. 그리곤 이곳에 와서도 한때 공비로 불렸던 산사람 얘기를 오다가다 만난 낙치의 노인들한테 들은 얘기를 꺼내놓았다.

“옛날 저 밑 운문사 마을에 산사람들이 들이닥쳐 보투로 노획한 쌀 한 가마니를 한 청년에게 지어서는 이곳까지 날랐다고 해요. 생각해봐요. 그때 쌀 한 가마니의 무게가 80㎏이니,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겨눈 총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단 생각을 안 했을까요. 그래도 살려는 의지는 죽음이란 헛된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죠. 그 청년은 용케 목숨 보전하고 제집으로 돌아갔지만, 쌀 한 가마니로 운명을 미룬 산사람들은 다 죽었겠지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무 좋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했다. 거기다 사흘 물만 마셨는데도 배고픈 줄 몰랐단다. 그렇게 이곳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산 지 57년 세월인데 저 밑에서 한두 시간이면 가뿐히 올랐던 이 길이 이젠 다섯 시간이 걸리니 열 시간 걸리는 날 출처관을 밝혀두겠다는 말씀이다.

억만겁산을 줄여 이름 붙였다는 억산과 삼지봉, 범봉을 차례대로 선 곳을 눈에 박히도록 보고 뒤돌아서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을 본다. 시원하다. 산들이 꾸짖는 경책(警策)을 언제까지 모르쇠로 할 건가.

돌아서 가던 산객의 발길을 또 한 번 채잡아 끈 건 상운암이 아니고 스님이다. 언제 법당 안 방석을 끄집어내셨는지 칠성바위에 고르게 넌다. 익어가는 그 방석 위로 잠자리 한 마리 발심을 내는데 저도 이곳이 서방정토인 줄 아는가 보다. 글·사진 백승휘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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