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53)]부다(Buda), 기억을 위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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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53)]부다(Buda), 기억을 위한 도시
  • 경상일보
  • 승인 2021.01.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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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①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윤심덕(1897~1926)이 부른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Losif Ivanovici 1845~1902)의 ‘도나우강의 잔물결(Donau Wellen Walzer)’을 번안한 노래다. 이 노래는 도나우강의 잔물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무주의적 가사로 시작한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아름다운 물결을 왈츠로 표현했던 원곡이 어떻게 죽음을 찬미하는 노래로 번안되었을까. 편곡자는 도나우강의 아름다운 정경 속에 깊이 침잠된 슬픔의 역사를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독일에서 발원한 도나우 강은 오스트리아와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관통하고 발칸반도를 지나 흑해로 나아간다. 동유럽 일대를 두루 거치며 젖줄이 되고, 거기에 정착한 무수한 나라들 사이에 애증의 역사를 엮어주었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기마민족 마자르족이 도나우 강변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왕국을 형성한 것은 9세기경이다. 한반도에 삼국통일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헝가리 왕국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적 잦은 침략에 시달린 헝가리인들
부다 지구에 왕궁짓고 수도 위용 갖춰
파란만장한 부다의 역사는 계속돼
식민지배 등 질곡의 그늘서 못벗어나
폐허에서 재건설 되기 누차 반복하며
유럽의 대표적 건축양식들 거쳐가
헝가리 대표하는 유물 ‘마타슈 성당’
부다 언덕서 하늘로 치솟는 첨탑으로
고딕 양식의 위엄 유감없이 보여줘


헝가리인들은 처음 페스트 평야 지대에 큰 도시를 건설했지만 외적으로부터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방어가 유리한 강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가 요새를 구축했다.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바로 부다 지구가 시작된 것이다. 걸어서 10여분이면 오를 수 있는 작은 언덕이지만 강변에서 그나마 기대어 버틸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다. 이곳에 왕궁을 짓고 헝가리 수도로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오늘날 같은 부다 지구의 모습은 14세기에 이르러 형성되기 시작한다. 유럽의 고도 중에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다. 로마 가톨릭을 수용하며 국력을 키운 헝가리 왕국은 16세기까지 부다를 유럽에서 가장 큰 성곽도시로 발전시켰다. 가톨릭의 국교화는 헝가리가 유럽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이에 따라 유럽 건축사의 조류에 편승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4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한 왕궁은 증축과정에서 고딕양식으로, 15세기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 혹은 증축되어 갔다.

▲ 부다페스트의 부다지구. 도나우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이 부다지구에서 헝가리 수도의 역사가 시작됐다.

파란만장한 부다의 역사는 이후로도 질곡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침탈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오스만 세력을 몰아낸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아야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폐허가 된 왕궁을 새로 지었으나 이는 헝가리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엔나에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을 도입했다. 식민지배자의 코드라고나 할까. 왕궁만이 아니라 교회, 관청, 저택들의 건축에서도 바로크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19세기 대화재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립전쟁으로 거의 소실되고 말았다.

자치권을 얻어낸 헝가리인들은 왕궁을 새롭게 건설하여 독립성을 과시하려 했다. 새 왕궁의 건설에는 네오바로크(Neo-Baroque) 양식이 사용되었다. 중정을 갖춘 거대한 건물들이 중앙의 바로크식 돔을 에워싸게 했다. 하지만 이것도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20세기 중반에서야 만들어지게 된다. 헝가리인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왕궁을 재건축했다. 큐폴라를 둘러싸는 긴 수평건물들이 지나치게 단조롭고, 거대하고, 과시적이 되었다. 그 중심이 되었던 큐폴라는 원래의 화려한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왕이 살지 않는 왕궁, 실속 없이 껍데기만 남은 공허함이 부다 언덕을 지키고 있다.

고딕시대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중 대표적인 것이 마타슈 성당이다. 마타슈(Matyas Hunyadi 1458~1490)는 15세기 헝가리 왕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군주다, 체코에 카렐 4세가 있다면 헝가리에는 마타슈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원래 성당의 이름은 ‘성모 마리아 성당’이지만, 마타슈 왕이 이곳에서 혼례를 올렸다고 하여 별칭이 더 유명해진 것이다, 이후 19세기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 왕을 겸하게 되었을 때 그 대관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명실공히 헝가리의 국가적, 정신적 구심점이라 할 것이다. 부다의 언덕에서 하늘로 치솟는 가장 높은 80m짜리 첨탑, 고딕 양식의 위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성당에서 강 쪽으로는 아케이드를 갖춘 발코니가 성당을 감싸고 있다. 어부의 요새로 알려진 이 발코니는 19세기 마타슈 성당을 복원할 때 만들어진 시설이다. 성당을 돋보이게 하려고 디자인된 이 건물은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남아 성당보다 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어부의 요새’라는 뜬금없는 이름도 어부들이 성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백색 대리석으로 쌓은 나지막한 아케이드는 정원같이 아늑한 외부공간을 만들었다. 큰 아치 안에 작은 아치를 넣어 만든 회랑, 모서리마다 세운 고깔지붕의 파빌리온(pavilion)은 동화 속의 삽화가 된다. 초원지역에 살며 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의 선조, 유목민들의 텐트 모양이라고 한다. 그 아치 안에 담겨진 도나우 강과 페스트 지구의 아름다움은 가히 부다 최고의 절경이다. 그 경관은 부다가 아니라 페스트를 담는다. 풍경은 틀을 통해 정제되고, 틀의 모양에 따라 다르게 담겨진다. 그것은 사람들을 도시풍경으로 빨아들이는 마법의 창이 된다. 비록 질곡의 역사이나 그것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의 노력들이 이토록 독특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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