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反求諸己(14)]늙은 제자 이야기
상태바
[송철호의 反求諸己(14)]늙은 제자 이야기
  • 경상일보
  • 승인 2021.05.21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송철호 문학박사·인문고전평론가

내게는 나보다 11살 많은 늙은 제자가 있다. 사실 나는 그를 단지 내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고 생각했지 제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20년 다 되어가는 세월 내내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고 자기를 제자라고 불렀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나브로 나도 그를 제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늙은 제자는 올해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짧지만, 그래도 마음을 담은 글을 하나 보내주었다.

‘스승님! 잘 계십니까?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아침에 감사 인사드려야 하는데 늦었지요. 뭘 하는지 온종일 비가 와도 그냥 바빴네요. 맑은 날은 들에 좇아가서 씨앗 넣고 풀 뽑고 하다가, 비 오니 머리가 길어서 며칠 후면 부처님도 뵈러 가야 하니 흰 머리 물도 들이고 공도 좀 들였네요. 스승님! 처음 뵈었을 때는 검은 머리였는데 어느새 백발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가는 세월 탓할 수는 없고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요? 그때가 저의 인생에 황금기였던 것 같아요.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행운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나는 21살에 과외선생을 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0년 넘는 세월 동안 대학에서, 대학 밖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잘 가르치지는 못했을지언정 진심을 담아서 정성껏 가르쳤다. 그런 내게 배운 사람은 많지만, 내가 제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전에 나는 스승의 날이라고 내게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나를 찾지 말고 너희들의 옛 선생을 찾아뵈라고 말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고 너희들과 내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 그때도 내가 스승이라고 생각나면 찾아오라고, 그럼 내가 술 한 잔 사겠다고 말했다.

늙은 제자는 방송대서 내 수업을 몇 번 들었다. 이후 내게 잠시 맹자와 한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다다. 그런데도 늙은 제자는 항상 나를 스승이라고 예의를 갖추어서 대했다. 스승의 날이면 짧게라도 진정성 담긴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내 머릿속 그는 수업 때마다 커다란 국어사전을 곁에 두고 찾아보던 모습이다. 초등학교만 나오고 나머지는 검정고시를 해서 남들보다 국어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했다. 맹자와 한시 수업 때는 그의 곁에 자전이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이해(利害)를 벗어난 진정성과 한결같음에서 출발한다. 송철호 문학박사·인문고전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도시철도 1호선, 정차역 총 15개 조성
  • ‘녹슬고 벗겨진’ 대왕암 출렁다리 이용객 가슴 철렁
  • 울산 동구 주민도 잘 모르는 이 비경…울산시민 모두가 즐기게 만든다
  • [창간35주년/울산, 또 한번 대한민국 산업부흥 이끈다]3년뒤 가동 年900억 생산효과…울산 미래먹거리 책임질 열쇠
  • 제2의 여수 밤바다 노렸는데…‘장생포차’ 흐지부지
  • [울산 핫플‘여기 어때’](5)태화강 국가정원 - 6천만송이 꽃·테마정원 갖춘 힐링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