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대 차를 소재로 한 유머 중에 ‘멀리~’라는 소절을 들었을 때 어느 가수의 노래를 떠올리는가를 보고 구세대인지 신세대인지를 알 수 있다는 우스갯말이 있었다. 이은하의 ‘밤차’라는 노래를 떠올리면 구세대요, 혼성그룹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을 떠올리면 신세대라는 것이다. 신세대의 상징이었던 가수 그룹이 해체된 지 25년이 넘으니, 이제는 이 유머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세대를 구분하는 표지가 될 만큼 옛말이 되었다.
대기업 SK가 선경의 머리글자라는 걸 기억하는 것도 이 유머처럼 세대를 구분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 시장에 한정하지 않은 해외 사업을 벌일 때 기억하기 쉽고 발음하기 쉬운 기업명은 단순한 편의를 넘어 업무효율과 경쟁력을 부여한다. 이를 간파한 대기업들은 세계화가 낯선 말이 아니게 된 시점인 90년대부터 우리말로 된 회사 이름을 영문 이니셜로 바꾸게 되는데, 럭키금성이 LG로(95년), 선경이 SK로(97년), 한국통신이 KT로(01년) 사명을 변경한 것이 그것이다. 이 추세는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제일제당이 CJ로(02년), 동부가 DB로(17년), 대림이 DL(21년)로 그룹 및 계열사 이름을 바꾸었고, 같은 해 LG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LX는 출범 시부터 그룹과 계열사명을 영문 이니셜로 통일했다.
영어를 모국어나 공용어로 쓰는 나라에서 설립된 외국 기업들이 회사 이름을 영문 이니셜로 하는 것은 애초부터 그네들의 말이었으니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는 상호나 기업명에 창업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보편적인 명명법인데 따른 문화적인 이유가 더 크다. 세계적인 생활용품 기업인 P&G는 창업자인 윌리엄 프록터와 제임스 갬블의 이름을, IT 기업인 HP는 스탠퍼드 대학 동문인 윌리엄 휼릿과 데이빗 패커드가 세운 기업인 것에 각각 기인한다. 풀 네임을 대신해 이니셜로 이름을 적는 문화가 기업명에도 자연스레 반영된 것이다.
영문 이니셜로 기업명을 정하는 데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다른 모든 말들이 그러하듯 이름은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은데, 이니셜링은 표기의 편의를 위한 일종의 줄임말이기 때문에 원문을 풀어 설명해주기 전에는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들이라면 여러 세대를 거쳐 시장에서 평판과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이거나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존 기업으로서는 이니셜에 소비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와 맥락을 담는 데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기업명이 둘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와 넷플릭스가 그것이다. 두 이름 모두 두 가지 단어를 조합해 회사의 정체성과 사업의 내용을 단순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컴퓨터의 핵심 장치인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합하여 줄인 말이고, 넷플릭스의 경우 인터넷 망을 뜻하는 넷과 영화(motion picture)를 의미하는 속어 플릭스(flicks)를 발음대로 적은 말(flix)과 합해 줄인 말이다. 두 이름 모두 창업자들이 간파한 산업의 핵심과 자신들이 시장에서 하려는 일을 군더더기 없는 말로써 설명해내고 있는데, 이 이름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지금은 성공한 기업가의 상징이 된 이들이 수십 년의 실적으로 입증해 낸 성과의 위대함만큼이나 창업 초기,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시절부터 이미 비즈니스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에 깊이 감명을 받는다.
지난 해 말, 울산에 본사를 둔 현대중공업이 그룹명을 HD현대로 변경했다. 지난 3월 지주회사명을 동일하게 변경한 이후로 9개월 만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초록색과 노란색 삼각형이 겹친 모양의 로고도 화살촉을 떠올리게 하는 밝고 투명한 느낌의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새 이름에 부여된 회사의 설명을 읽고 있으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사람들이 갖는 기대 같은 것이 느껴진다. 현중의 새 이름이 기업 구성원들 뿐 아니라 사회와 시장에 공감되고 인정받는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불려지길 바라고 기대한다.
이준희 미국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