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 공업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962년 울산이 공업센터로 지정될 당시 공업탑 ‘울산공업센터 지정선언문’에 새겨진 글귀다. 이후 6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울산은 눈부시게 성장하며 대한민국 경제산업수도로 자리매김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으로 피폐했던 동해안의 작은 어촌마을이 명실상부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도 뒤따랐다. 고향 산천을 하루아침에 떠나야 했던 공단 이주민들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피땀 흘려 일했다. 악취와 폐수 때문에 시민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산업화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지만 이를 감내해낸 울산의 희생과 저력은 위로와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얼마 전 연세 지긋한 민원인 한 분이 찾아왔다. 남구 성암동 개운포 인근 선수마을이 고향이라는 그분의 사연은 이러했다. 1960년대 공장이 들어서면서 집단이주가 시작됐고 이후에는 공단 공해 때문에 모두 마을을 떠나게 됐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영원히 고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삶터를 옮겨야만 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신세가 됐다고. 울산시에서는 이주민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고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도록 2008년 성암공원에 망향탑을 세워주었고 망향전시관과 망향정도 건립해주겠노라 약속했지만 계속 미뤄지고 있다고 했다.
칠순을 넘어선 어르신은 실향민의 한(恨)은 물론 다음 세대를 위해 울산 공업단지 조성 전, 울산의 모습을 알려 줄 수 있는 역사의 장이 절실하다고 토로했다. “처용암과 개운포 성터는 울산이 자랑할만한 소중한 문화재다. 또 경제개발이란 국가적 소명을 위해 실향의 아픔을 감내한 공단 이주민의 이야기는 우리가 반드시 알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과 당신 세대가 죽으면 이 소중한 추억과 유산은 영원히 사라질 거라고….
며칠 후 상황이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어 남구 성암동 선수마을 망향비를 직접 찾았다.
“조국 발전과 공업도시로 태어나는 울산을 위해 공해에 찌든 사랑하는 고향을 두고 떠나간 3만여 10개 동 그리운 얼굴들 어느 하늘 아래 어떻게 살고 있나요?”라는 문구가 새겨진 망향비가 공단을 배경으로 쓸쓸히 서 있었다.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망향비까지 오르는 비포장길은 가파르고 험했고 여름 풀이 무성했다. 대규모 공단 안에 있는 탓에 평소 사람의 발길은 거의 없는 듯했고, 그 존재를 일부러 가리기라도 하듯 숨겨져 있었다.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어촌의 정경은 어디에도 없고 주변은 공장으로 가득 찼다.
2023년 6월1일 대한민국 경제수도 울산시민들의 대화합을 위해 ‘울산공업축제’가 35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새로운 시작 위대한 첫걸음’을 주제로 한 이 축제는 7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특히 거리 행진은 많은 비에도 기업과 노동자, 시민단체의 단합된 모습으로 울산의 저력과 위상을 보여줬다. 이로 인해 ‘역시 울산’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61년 전 울산공업탑에 새겨진 공업센터 지정선언문처럼 울산은 ‘겨레의 아침을 연 영광의 터전’이자 ‘겨레의 곳간’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제야말로 잊혀져 가는 산업수도 울산의 과거를 재조명하고 미래의 지속적인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다. 울산의 역사와 옛 문화를 비롯해 산업화를 이끌어 낸 모든 이들의 피와 땀, 눈물을 스토리텔링해 울산에 대해 다시금 이야기했으면 한다. “내가 살던 옛 선수마을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지금 울산은 공업축제가 한창입니다.” “울산은 국가경제발전의 원천이었음을 자부하며 미래 100년의 영광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등등. 더 늦기 전에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울산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모두가 지혜와 역량을 모았으면 좋겠다.
김동칠 울산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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