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곪을 대로 곪았던 ‘교권 추락’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고, 이제라도 공교육을 바로 세워보자는 교사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전국초등교사노동조합이 지난 21~24일 전국 초등교사 239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99.2%에 달하는 2370명의 교사가 교권 침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학생의 교사 폭행은 2018년 165건에서 2022년 347건으로 4년동안 2배 넘게 늘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는 말은 정말이지 옛말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바뀐다고는 하지만 스승의 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스승의 은혜를 합창했던 필자로서는 99.2%, 347건의 숫자들이 당혹스럽다. 반대로 그때는 사랑의 매로 둔갑한 교사 폭력이 난무했으며 촌지 문화가 극성이었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는 교사의 차별과 폭행, 언어폭력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친구’(2001년)에 나와서 유행어가 된 대사다. 최근 화제가 됐던 OTT 드라마 ‘더 글로리’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갑질, 직장 내 성희롱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비단 학교만이 문제일까?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고객응대 근로자 보호조치를 시행하고 있사오니 따뜻한 마음으로 대화 부탁드립니다. 지금 통화하고 계신 직원은 누군가의…….”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을 때 쉽게 들을 수 있는 안내 메시지이다. 과거엔 소비자 권리가 절대적으로 강조되며 ‘손님은 왕’이라는 보편적인 정서가 만연했다. 그러다가 상담원뿐 아니라 간호사, 항공 승무원 등 고객 응대업무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인권이 이슈가 되었고, 국회는 2018년 산업안전보건법에 ‘감정노동자 보호법’이라 불리는 감정노동자 보호조치를 추가했다.
아파트 주민의 모욕과 폭행, 위협을 견딜 수 없어 경비원이 목숨을 끊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 만들어졌고 운전 중인 버스기사 폭행 문제가 불거지자 기사와 승객 간에 격벽이 설치됐다. 직장 안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갑질문제가 상존한다. 또 층간 소음, 주차장 불화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이 표면화되고 이 사회에서 존중과 배려는 사라지고 있다. 악성 댓글 문제는 또 얼마나 심각한가. 익명성 뒤에 숨어서 인격을 파괴하고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무서운 말들을 쏟아낸다.
익명의 네티즌들만 모욕을 주는 게 아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신이 불쾌해지면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걸로 되갚음한다. 누군가 잘못했다고 생각될 때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한다면, 그게 바로 갑질이다. 내가 당하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대부분의 갑질은 다른 대상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나보다 약해보이는 누군가에게로 가서 다시 분출이 된다. 모욕과 갑질의 먹이사슬은 이어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2011년부터 매년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를 발표한다. 더 나은 삶 지수에는 ‘공동체지수’를 비롯해 삶과 일의 균형, 안전, 양극화 지수 등의 여러 지표가 포함돼 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공동체지수는 41개국 중 32위로 하위권이다. 개인주의 사회라고 알고 있는 서구 사회보다 우리의 공동체가 훨씬 취약하다.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한쪽이 이득이면 한쪽이 손해인 제로섬인 관계인가? 소비자와 고객응대 근로자, 손님과 점원, 버스승객과 기사, 아파트주민과 경비원은 어떤가? 세상을 둘로 쪼갤 수 없듯이 우리는 항상 ‘갑’, 항상 ‘을’이 아니라 어떤 때는 갑이 되고 어떤 때는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 아니 원래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서로 존중하고 협력할 때 원래 그 관계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 잘 달성될 것이다. 나와 나의 가족이 소중한 만큼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존엄을 지켜주는 배려는 결국 나와 나의 가족에게 돌아올 것이다.
김영문 한국동서발전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