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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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12)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6.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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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울산 무룡산과 기박산성, 농소 일대에서는 왜군과 의병 등의 전투가 벌어졌다. 장편소설 <군주의 배신>의 주 배경이 되고 있는 관문성 전경. 울산시 제공

1598년 1월4일까지 조명연합군은 계속해서 성을 공략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6만명의 왜군 지원병이 울산으로 집결하자 경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정 출신 장오석 장군과 이인상 등 울산지역에서 활약하던 의병장들이 다수 사망하였다. 천동은 관군에 흡수되어 전투에 참여한 울산의 의병들 속에 섞여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으나 성안에서 저항하는 왜군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워낙 견고하게 지어진 도산성인지라 넘어가서 안으로 잠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이 전투에서 아무런 전공도 올리지 못했다. 조명연합군이 후퇴하자 왜군은 연합군을 경주까지 쫓아가며 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왜군들은 경주로 조명연합군을 쫓아가면서 승군을 조직하여 왜군에게 대항했던 근처의 사찰들을 불태웠는데, 기박산성 근처에 있는 함월산의 건흥사와 토함산의 불국사가 대표 사찰로 그들에게 지목돼서 전소되었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난 천동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 명이 넘는 대군은 개인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천동은 집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송내마을은 물론이고 울산의 백성들은 군수 김태허와 함께 지난해 10월말에 경주로 피란하여 울산지역에서 조선인의 모습은 보기가 어려웠다. 천동의 동무들은 무룡산 동편의 골짜기로 피란하였고 천동은 옥화를 정상 부근의 동굴집으로 피신시켰다.



-보부상 서신 12호-



조선 조정에서는 도산성 전투에 대한 양호의 공을 높이 치하하고 그를 극진히 모셨다. 양호는 도산성 전투에 대한 명황실의 보고서에서 사망자 수를 백여 명으로 축소하여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양호와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명의 경락 정응태는 이것을 알고 양호를 탄핵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선이 일본과 짜고 길을 열어서 요동을 칠 것이라고 무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명의 조정은 대노하여 조선에서의 철군과 함께 조선에 대한 정벌론까지 거론되었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해명사로 누구를 보내는가를 놓고 논의가 벌어졌는데, 류성룡은 아흔 살의 노모가 있어서 연경에 갈 수 없다고 하여 이정구와 이항복을 보내기로 하였다. 조선 조정의 ‘변명상소문’은 문신 이정구가 작성하고, 외교적 언변에 능한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로 떠났다. 명나라에 의해서 조선왕조가 붕괴될 수도 있었던 풍전등화의 절박한 시기에 두 사람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여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

도산성에 머물고 있는 왜군들은 관군과 의병들을 의식해서 성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수백 명씩 단체로 움직였다. 무룡산 정상에서 매일 왜군의 동향을 지켜보던 천동은 수십 명씩 나누어 조선인들이 피란 가서 텅 빈 마을들을 뒤지는 왜군들 중 조총을 휴대하지 않는 무리를 골라서 소리 없이 암살해 나갔다. 열한 명을 죽이고는 뒤에서 소리 없이 달려든 왜적의 칼에 그도 쓰러졌다.

글 : 지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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