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어린이도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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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어린이도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 경상일보
  • 승인 2021.08.0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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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정 온남초 교사

지난 7월에 열렸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 <꿈속의 타리크>라는 터키 영화 한 편을 봤다. 영상 속 이국적인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어린이영화지만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고 철학적인 장면들이 많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기형도의 <빈집>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동차 사고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자신은 기억을 잃은 채 할아버지 댁에 보내진 타리크, 지진으로 연인을 잃은 재키, 손자의 엄마이자 자신의 딸을 잃는 타리크의 할아버지까지. <꿈 속의 타리크>는 상실의 슬픔으로 처연한 눈동자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였다.

세 사람은 녹록치 않은 삶 가운데 서로를 보듬어준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을 잡담거리로 소모할수록 서로를 챙겨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사고로 어미를 잃은 작은 망아지까지 손수 거두어 키운다. 어미가 없는 망아지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우유를 주는 마음은, 자신들에게 곁을 내어준 망아지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리크는 부모를 잃고도 울지 않았다. 사고로 기억을 잃기도 했지만,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모를 붙잡으려 애쓰다가도, 낮 동안에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또래 친구들과 마을을 누비며 신나게 논다. 그렇게 타리크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달력 넘어가듯 흘러가며, 어떤 갈등이나 기승전결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타리크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을 겪은 뒤였다. 어린 주인공에게 그보다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사건이 얼마나 더 있을까. 영화가 잔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어린이에겐 어른보다 슬퍼할 기회가 적게 주어진다. 어른들은 아이가 우는 것을 보면 다른 자극을 주어 얼른 달래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어린이들은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다. 소중한 존재를 잃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슬픈 일인데도 어른들은 어린이의 슬픔을 과소평가하며 상실한 것을 다른 것으로 쉽게 대체하려는 경우가 많다.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다른 동물 사줄게”라고 말하거나 친한 친구들을 떠나 이사할 때 “새 동네에 가면 친구들이 더 많아”라고 하는 것이 그렇다. 경험치 높은 어른의 눈높이로 어린이의 슬픔을 “뭐 그런 걸로 울고 그래?”라고 판단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타리크는 죽은 망아지를 묻을 때가 되어서야 울음을 터뜨리며 마을을 지키는 할아버지 소나무의 품에 달려가 안길 수 있었다. 슬픔에 잠긴 어린이를 그저 불쌍하게 여기거나 얼른 달래서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애쓰지 말아야겠다. 대신 그 작은 존재가 느낄 우주만한 슬픔을 위로하며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주어야겠다. 믿을만한 존재에게 안겨 펑펑 울고 나면 마음속에 뚫린 구멍에도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결국 마지막엔 꿈속에서 엄마를 찾은 타리크처럼.

이민정 온남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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