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곡의 제자 양성을 보자. 그는 언양 유배 중 두 명의 제자를 길렀다. 김지(金志)와 박민효(朴敏孝)가 이들이다. 김지는 1666~1748년(현종 7~영조 24)에 생몰했다. 고조부 김용은 1590년(선조 23)에 언양에서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증조부 김선립은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부 김차안은 무과에 합격했으나 일찍 사망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는 홀어머니 광주노씨 슬하에서 자랐다.
◇김지와 박민효, 남곡의 제자가 되다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이 찬술한 김지 묘갈명은 그가 남곡의 제자가 된 사연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김지는 남곡공이 언양현에 적거할 때 찾아가 배우기를 청했다. 남곡이 가르치면서 그의 고요하고 묵묵함(靜默)을 아껴 성공하리라 기대했다. 얼마 후 남곡이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간으로 복귀할 때 서울로 데려가려 했으나 ‘홀어머님이 계셔서 멀리 나갈 수 없습니다’ 하며 사양했다.” 당시는 사제의 정의(情誼)보다 효행이 우선하던 시대였다.
박민효는 임란 의병장 박진남의 증손으로 울산 출신이다. 1672~1747년(현종 13~영조 23)에 생몰했다. 그는 언양에 유배 온 권해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아들 박봉시가 찬술한 ‘선고생원부군연보’(이하 연보)에 그 사연이 실려있다. “숙종 13년(사실은 12년) 16세에 권해 시랑이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책을 등에 지고(負) 따라가 선비와 군자가 가져야 할 몸가짐(行己)을 듣고 따랐다. 또 <논어>를 얻어서 읽었다.” 그가 훗날 은사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에게 보낸 편지에 “예전에 남곡자(南谷子)께서 언양에 유배오셨기에 문하에서 입신(立身)·행기(行己)의 방도를 배웠습니다” 했다.
그는 남곡이 해배되자 김지와 달리 동문 몇 사람과 함께 스승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갔다. 스승이 1692년(숙종 18) 평안도관찰사로 나갈 때 역시 동문들과 함께 따라가 시봉하면서 수학했다. 남곡은 1694년(동 20) 갑술환국으로 다시 창성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동 23) 해배되어 예안에 은거했다. 제자는 스승이 병이 들자 직접 찾아가 문병하고, 1704년(동 30) 사망하자 달려가 곡하고 삼베 헝겊을 매어(加麻) 상복을 대신했다.
박민효는 갈암의 문하에도 들어갔다. 갈암은 영해 출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그는 숙종조에 산림유현(山林儒賢)으로 천거되어 대사헌·이조판서를 역임했다. 박민효가 갈암이 우거하고 있는 안동 금소에 예물을 가지고 찾아갔으나 당신은 함경도 종성에 유배 중이었다. 이에 남곡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유배에서 풀려 향리로 돌아오시면 찾아가 스승으로 모셔라” 해서 이를 따랐다. 박민효는 다섯 형제가 함께 공부할 초당을 지어 상체헌(常軒)이라 이름하고 갈암에게 기문을 부탁했으니, ‘상체헌기’이다. 그 마지막 부분은 이러하다.
◇남곡, 갈암과 박민효
“울주 고을은 영남에서도 외진 곳으로 서울과 거리가 수천 리나 된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았고 남쪽 변방에 치우쳐 있어 당세에 뛰어난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제 사원(士源, 박민효의 자)이 우뚝하게 자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다.…” 박민효의 별호 ‘호걸지사’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남곡과 갈암은 어떤 사이였는가? 남곡은 12년 연상인 갈암을 선학으로 존경했다. <갈암집>에는 다음과 같은 긴 제목의 시가 있다. “갑술년 가을, 내가 종성에서 귀양살이 했는데, 권학사도 단양 영양역에 유배된지라, 그곳이 내 선친께서 사시던 옛집과 거리가 겨우 2리 남짓이었다. 그가 하루는 폐허가 된 이 옛집을 찾았다가 슬퍼하면서 율시 한 수를 지어 내가 있는 변방으로 부쳐주었다. 이에 감회가 북받쳐 눈물을 흘리면서 그 시에 차운하여 아픈 마음을 읊었다.”
<갈암집>에는 남곡에게 보낸 서찰이 3통이 실려있다. 이 외에 조정에서도 홍문관부제학 권해와 이조참판 이현일이 경연에서 숙종과 함께 정사를 논의했으니 가히 망년지교라 할 만하다. 남곡이 박민효더러 갈암에게 수학하라 한 연유를 이로써 알 수 있다.
이렇게 남곡의 소개로 갈암을 만난 박민효는 이재·권상일·정만양·권만 등 영남좌도의 학자들과 도의로써 교유하며 강론했다. 그가 향리에 정사를 지어 긍구당(肯構堂)이라 하고, 또 무릉재(武陵齋)를 중수해서 학문을 닦으니 원근의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 진사 김경천과 서석린(徐錫麟)이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 김경천은 의성, 서석린은 언양 출신이다. 김경천은 저술을 남기지 않아 자세한 행력을 알 수 없다.
◇언양 학맥의 형성
서석린은 청도 출신인데, 언양으로 이거했다. 첫 부인이 진양(진주) 강씨로 보아 처향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울주군 상북면에 진주강씨 집성촌이 있다. 앞의 박봉시가 찬술한 ‘연보’에 따르면, 박민효가 59세인 1730년(영조 6)에 “서몽응이 평발(平髮)로 오고, 김중직 상사(上舍)가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은가” 했다. 몽응은 서석린의, 중직은 김경천의 자(字)이다. 서석린을 평발이라 한 것은 그가 아직 진사시에 합격하지 않았고, 김중직을 상사라 한 것은 합격했음을 말한 것이다. 서석린은 박민효 사후 만사(輓詞)에 ‘시생(侍生)’이라 자처했고, 김경천은 그의 <행장>을 찬술하면서 자신을 ‘문하사(門下士)’라 했다. 모두 제자, 또는 문하생이란 뜻이다.
이리하여 언양에는 김용 → 김선립 → 김원이 → 김차안 → 김지의 경주김씨 가전(家傳) 학맥에 더하여 권해 → 김지·박민효와, 이현일 → 박민효→서석린 학맥이 형성되었다. 김지는 종숙 김영하·김정하 형제와 더불어 반구서원 창건의 주역이 되었고, ‘반구서원창건록’을 남겼다. 김정하의 아들 김당은 서석린·정동형과 함께 언양읍지 <헌산여지승람>을 찬술했는데, 이는 <여지도서>의 ‘경주진관언양현’ 항이 되었다.
김당의 아들 김용한(金龍翰)은 서석린의 제자이다. 그의 호 ‘염수헌(念睡軒)’은 ‘수오(睡)를 생각한다’는 뜻인데, 수오는 서석린의 호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염수헌집>을 남겨 권해 → 김지·박민효 → 서석린 → 김용한 언양 학맥의 정점이 되었다. <염수헌집>에는 언양의 경승을 읊은 시들이 가득 실려있다. 또 언양현의 여러 유교 문사(文事)에는 거의 예외없이 그의 기문·고유문·축문·제문 등이 실려있어 스승 서석린의 <수오선생문집>과 더불어 조선후기 언양 유학을 대표하는 저술로 남아있다.
이렇듯 권해의 짧은 기간 언양 유배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의 유배처럼 청년들이 선진 학문을 접하는 계기가 되어 고을의 유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