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박물관 특별전 ‘울산산업 60년, 대한민국 이끌다’]산업수도 울산, 60년 부흥의 역사를 더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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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 특별전 ‘울산산업 60년, 대한민국 이끌다’]산업수도 울산, 60년 부흥의 역사를 더듬다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2.01.2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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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셔널 지오그래픽 1969년도 매거진. ‘갓 쓴 노인’이 정유공장을 둘러보며 놀라는 장면, 상징적인 이 한 컷으로 한국(울산)의 사회변화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산업수도 울산의 출발을 1962년 2월3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울산공업지구 기공식이 열린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의미있는 기념일이 또 있다. 기공식이 열리기 일주일 전, 1962년 1월27일이다. 바로 동해안의 조그만 어촌 울산을 울산공업지구로 공포한 날이다.

울산박물관이 특별전 ‘울산산업 60년, 대한민국 이끌다’를 27일 시작했다. 지난 60년의 울산경제성장이 시대별, 주제별, 이야기별로 다뤄진다. 이번 전시는 도슨트의 해설을 꼭 들어야 한다. 관람 후 2층 산업관까지 들르면 더욱 좋다. 미처 알지못한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희미해진 우리의 기억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다.
 

▲ 울산박물관은 총 4대의 포니자동차를 소장하고 있다.
▲ 울산박물관은 총 4대의 포니자동차를 소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성장 첫걸음

울산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드물게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60년 전 울산공업지구의 출발도 일사천리였다. 1962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울산군을 계획공업도시로 설정하여 대규모 공업단지 건설을 추진했다. 1월4일 울산공업센터 지정 가능성을 토의했고, 안경모 국토건설청 차장이 이끄는 조사단이 1월7일부터 14일까지 울산 현지를 조사했으며, 한국경제인협회가 울산을 공업센터로 지정해 달라는 건의서를 뒤이어 제출했다. 1월27일 울산공업지구가 결정·공포됐고 2월3일 기공식이 열렸으며, 2월7일엔 울산개발위원회 울산개발계획본부, 한달 뒤인 3월7일엔 울산특별건설국이 설치됐다. 그해 6월 울산군은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나뉘어졌다.

이후 14년간 운영된 울산특별건설국은 공단과 댐, 도로, 항만 등 울산의 모든 기반시설을 구축했다. 울산공단 내 제철공장 건립이 힘들어지자 이를 포항으로 옮겨 포항제철을 세운 곳도 바로 특별건설국이다. 당시 건설국장은 2급(도지사급), 울산시장은 4급이었다.
 

▲ 울산공업지구 기공식(1962년 2월3일)
▲ 울산공업지구 기공식(1962년 2월3일)

◇일본토목기사 미소노 가즈오

조성 당시 국내 기술만으로는 건설이 어려워 외국 기술자를 데려와야 했다. 일본인 미소노 가즈오는 1963년 울산에서 토목기사로 일하며 울산공업단지 배수로 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공사 현장 뿐만 아니라 울산 곳곳을 다니며 60년 전 울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자료는 울산박물관에 기증됐다. 이번 특별전에서 1분6초 분량의 영상으로 편집 돼 상영되고 있다.



◇당시 건립비 500만원, 공업탑

산업수도 울산의 상징물 공업탑은 ‘울산공업센터 기념탑’을 줄인 말이다. 공업탑과 울산공업센터가 같은 해 지어진 건 아니다. 이 공업탑은 기공식 이후 5년 뒤인 1967년 4월20일 건립됐다. 이때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애초 걱정과 달리 성공리에 끝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이 시작된 해였다. 공업탑의 진정한 의미는 경제개발계획 성공을 자축하고, 우리의 발전을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는’ ‘민족재흥’이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알린데 있다. 당시 투입된 예산은 500만원이다. 청와대와 울산시가 함께 부담했다.
 

▲ 울산의 첫 노동투쟁, 정유공장건설회사 부당해고 반발시위(1963년 8월)
▲ 울산의 첫 노동투쟁, 정유공장건설회사 부당해고 반발시위(1963년 8월)

◇산업수도 울산의 그림자

폭풍같은 경제성장은 울산을 풍족한 도시로 만들었지만 그 이면에 짙은 그림자도 드리웠다. 온산공단은 1974년 비철금속공업기지로 지정된 후 1980년대 들어 화학, 제지, 자동차부품 등 다양한 업종의 종합단지로 탈바꿈했다. 온산병은 이때 발생한 공해병이다. 1983년 농작물과 양식어장 피해로 시작돼 어느 순간 사람에게도 발병했다. 허리와 팔다리 등 전신이 쑤시고 아픈 증세가 나타났다. 1985년엔 주민 1000여명이 전신마비증상을 겪기도 했다.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됐고, 국내 첫 공해 피해 인정 사례로 남게됐다.



◇1960년대 이미 노동운동 시작

1987년 7월5일 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으로 시작된 울산노동자대투쟁은 이후 현대그룹 사업장의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노동운동으로 울산의 노동자들은 전례 없는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울산은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노동자대투쟁의 출발점이자 노동운동의 메카가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투쟁보다 20여년 이나 앞선 시기에 이미 노동운동이 있었음을 새로 알려준다. 울산 최초의 노동시위사건으로 추정되는 흑백사진 속에는 1963년 8월, 정유공장 건설회사의 부당해고에 반발하는 울산 노동자들 시위 장면이 담겨있다.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이후 불과 1년 여 이후의 일이다.



◇중국 교과서에 수록된 울산

중국의 중등교과과정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는 산업수도 울산이 소개되고 있다. 중국 교육제의 7학년(우리나라의 중학교 1학년)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는 울산이 세계적 자동차도시로 기재돼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를 수 있지만 세계 최고 생산능력을 가진 자동차 제조공장은 유럽·미국도 아닌 한국 울산시에 있다. 반세기도 안되는 기간에 울산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및 일본의 도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동차도시로 거듭났다’고 돼 있다.



◇울산 60년의 변화 추이

울산경제부흥은 60년이 흐른 지금 수많은 수치로 확인된다.

21만여명이던 도시 인구는 112만명으로, 26만 달러에 불과하던 연간 도시 수출액은 760억 달러로, 136대 뿐이던 자동차 등록 현황은 58만1429대로 각각 늘어났다. 울산이 견인하던 한국경제수준은 60년 전 80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을 31만600달러 수준으로 치솟게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와함께 울산사택문화, 공업탑 주제의 미디어아트, 근로자의 문화생활, 향우회 활동 등 도시개발의 주역과 그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신형석 울산박물관장은 “울산발전은 대한민국 현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올해는 울산공업센터 지정 60주년인 동시에 울주군 60주년, 울산시 60주년, ‘급할시’로 시작된 울산광역시 25주년이다. 각각의 의미가 크다. 울산의 미래는 과거에 있다. 기억으로 저장된 과거를 들여다보면 미래를 위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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