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6·25이후 늘어난 신불산 빨치산 지휘하던 엘리트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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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6·25이후 늘어난 신불산 빨치산 지휘하던 엘리트 지도부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2.04.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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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불산 남도부 아래서 장두천과 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던 구연철씨가 지난주 자신의 집이 있는 부산 해운대에서 장씨의 빨치산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구씨는 구덕산에서 체포된 후 옥중생활도 장씨와 대전형무소에서 함께 했다.

신불산에 빨치산이 모여들기 시작한 때가 이승만 정권 수립 전후다. 이 무렵 미군이 남로당을 탄압하자 울산 인근에 있었던 남로당 당원들과 또 남로당을 지지하는 마을 주민들이 입산했다.

6·25전까지만 해도 신불산에는 이렇게 울산 인근에서 모인 사람들이 조선노동당의 당원이 되어 활동했다. 이 조직은 부산시와 양산군·동래군·울산군·밀양군을 관할했는데 위원장은 진해 출신의 빨치산 공인두였다.

처음에는 숫자가 제법 되었다. 그러나 변변한 무기도 없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6·25 직전에는 신불산의 빨치산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신불산에 빨치산 숫자가 다시 늘어난 것은 6·25가 일어나면서다. 이때 함양 천석꾼 아들로 일본에서 유학까지 했던 남도부가 빨치산 대장이 되어 부하들을 데리고 신불산으로 들어왔다.

남도부가 신불산으로 들어올 때는 북의 정예부대원들을 많이 동행했다. 그가 신불산에 머무는 동안 울산에서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남로당 당원과 혹은 부역자로 몰려 죽는 것을 두려워 한 마을 사람들이 신불산으로 들어왔다.

이 중에서도 1925년 동구 일산동에서 태어났던 장두천은 제 발로 신불산에 들어가 남도부 최측근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남도부 신임을 받았다는 것은 장씨와 함께 나중에 남도부의 핵심 간부가 되었던 구연철(92)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구씨는 6·25 직후인 1950년 7월 입산했는데 자신이 신불산에 들어가 보니 이미 장씨가 남도부 측근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양산 출신인 구씨는 6·25 직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서북청년단의 폭력을 비호하는 이승만 정권을 보면서 실망해 데모를 하다가 경찰에 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고향인 양산으로 와 쉬고 있을 때 6·25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을 위해 북한에 총부리를 겨누기보다는 차라리 빨치산이 되어 인민해방운동을 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으로 스스로 신불산에 입산했다.

장두천은 1946년 11월 남로당에 가입한 후 활동하던 중 미군의 탄압을 피해 1949년 11월28일 입산했다. 입산 후에는 ‘장혁’이라는 가명으로 1954년 체포될 때까지 남도부 부대의 요직에서 활동했다.

장씨가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대구 명정상고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일산동으로 와 해방 직전 일년간 보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일제 강압에 못이겨 징병 3기로 태평양 전쟁에 출정했다. 해방 후 귀국, 다시 보성학원에서 교원 생활을 하던 중 부산수산대학교에서 일년 간 수학 후 이 학교 강사가 되었다. 그가 남로당에 가입한 때가 이 무렵이었다. 장씨가 어떤 과정을 통해 남로당에 발을 들여놓았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가 교원으로 있었던 보성학교는 1922년 민족주의자 성세빈이 설립했는데 이 학교 교사들 중에는 항일운동가들이 많았다. 장씨 집안만 해도 1925년 장병준, 1933년 장기준이 교사로 활동했는데 둘은 모두 장씨로 보면 삼촌이다.

동구에는 인동장씨 집성촌이 일산진, 번득, 녹수, 남목 등에 있었다. 이중 장두천은 일산진 출신으로 집이 민족주의자로 보성학교를 설립한 성세빈 집 인근에 있었다.

글체가 뛰어났던 장씨는 신불산에 있는 동안 전투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선무활동에 사용하는 선전문을 만들었고 입담도 좋아 유격대가 보급 전투를 나서기 전 먼저 마을로 내려가 선무공작에 앞장서는 등 유격대 지원활동을 인정받아 남도부의 최측근이 되었다.

구연철은 “내가 신불산에 들어갔을 때는 범서와 두서·언양에서 입산한 동지들이 많았는데 장두천 동지는 동구 출신의 한명으로 나보다 앞서 입산해 있었다”면서 “빨치산은 상대방의 본명은 물론이고 심지어 고향까지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에 장씨의 고향이 울산 동구였다는 것은 그가 체포된 후 나와 함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처음 알았다”고 말한다.

장두천과 구연철이 체포된 것은 휴전 직후였다. 이때 신불산 빨치산들은 산에서 싸우기보다는 도심으로 들어가 지하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장씨와 구씨 등 4명이 부산으로 이동, 구덕산에 아지트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선무공작을 할 계획을 세웠다.

국제신문은 1954년 4월3일자 기사에 ‘구덕산에서 공비 3명 생포’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체포 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1일 하오 4시 본서 사찰 유격대 300여 명의 경찰력을 집결, 트럭에 분승시켜 도청에서 불과 3㎞밖에 떨어지지 않은 구덕산 뒷산의 와곽 선을 포위하고 약 3개월 전부터 구축된 공비 아지트를 급습 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3명의 무장 공비를 생포하고 카빈총 3자루와 실탄 200여발, 수류탄 2개, 불온문서 한 가마니 등을 압수하였다. 동 유격대에서 전기 3명의 공비를 취조한바 자칭 공비 제4지구당 부산지구 특수공작대 책임자 張斗千(30·본적 울산군 방어리 일산 227), 宋相俊(28·본적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 82), 具然喆(24·본적 양산군 상북면 석계리)로 판명되었다.’

이들 3명은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중 장씨와 구씨가 서열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어 사형을 구형 받았다. 장씨의 조카 장승부(78·서울 거주)에 의하면 사형을 구형받았던 장씨가 판결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은 당시 그의 어머님이 문전옥답을 팔아 안준기 변호사를 선임해 장씨 구명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안 변호사는 1954년 5월 제3대 총선에서 울산 을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한 후 나중에 산청으로 가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장씨는 대구와 대전을 거쳐 모범수로 출옥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이미 52세였다. 그가 옥중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옛 초가집이었던 그의 집은 기와로 개량되어 있었지만 다른 것은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장씨가 옥살이 하는 동안 가족들은 옥바라지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친인척들 역시 연좌제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조카 장승부가 울산농고를 잘 다니다가 학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간 것도 연좌제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경찰이 찾아와 나를 방어진으로 데리고 가더니 지서로 가지 않고 바로 당시 방어진 철공소 옆에 있었던 큰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 보니 동구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예비검속으로 함께 잡혀 왔던 사람들이 모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을 떠나면 좀 나아질까 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가 장사를 했는데 구멍가게 하나만 얻어도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면서 경찰이 따지는 바람에 아무런 장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장씨가 20여년이나 옥살이를 한 것은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카 장씨의 얘기다.

“삼촌이 대전에서 옥살이 할 때입니다. 삼촌이 8·15 특사로 출옥한다고 해 형무소 앞에서 할머니와 기다리고 있어도 보이지 않아 간수에게 물어보았더니 ‘전향을 하지 않아 이번에도 나오지 못했다’고 해 실망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출옥 후 장씨는 일산동 김병희씨 주선으로 김씨의 아들 대성이 운영하는 대성주택에서 한동안 일했다. 김병희씨는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로 건국준비위원회 울산지부 교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늦게 결혼했다. 신부는 밀양 출신으로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대성주택에서 나온 후에는 한동안 화정 새마을금고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화정초등학교 뒤에서 슈퍼를 운영하기도 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경찰의 감시를 끝없이 받으면서도 그나마 장씨가 새마을금고 등 금융계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입산하기 전 보성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두천의 4촌동생으로 동구의회 의장을 지냈던 장두철씨는 “형님이 평소 차분한 성격으로 손재주가 좋아 문중 총무 일을 맡겼더니 가첩을 만드는 등 문중 일을 열심히 했다”고 말한다.

당시로는 농촌 젊은이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수산대학교에 입학해 집안의 기대주였던 두천은 한순간 발을 잘못 들여 놓는 바람에 이념의 공간에서 고생만 하다가 68세에 눈을 감았다. 그는 현재 경주공원묘지 가족묘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다.

일산동에 오랫동안 있었던 그의 생가는 최근 마을에 소방도로가 나면서 사라져 지금은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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