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손 장군 ‘억울한 옥살이’ 40여년후에야 무죄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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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손 장군 ‘억울한 옥살이’ 40여년후에야 무죄로 밝혀져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2.04.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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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장충단공원에 있던 박대통령 공관에서 육영수 여사와 함께 지만이가 놀고 있는 모습. 육여사 왼편에 뒷짐을 진 이가 손장군이다. 많은 경호원이 있지만 손장군 혼자 권총을 찼다. 손장군이 갖고있던 사진으로,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윤필용 사건’은 1973년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소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어느 날 술자리에서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해서 불거진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를 박정희 대통령이 알게 되면서 손영길 장군을 비롯한 윤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벌되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이후락·손영길·이재걸 등 울산 출신으로 중앙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중에서도 손장군은 군인의 명예와 영광을 모두 잃었고 그가 그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군복도 벗어야 했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후락은 중정부장으로 북한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손장군은 육사 11기로는 전두환과 함께 가장 먼저 별을 달고 수도경비사령관 부사령관겸 참모장을 거쳐 15사단 부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그리고 판사 출신인 이재걸은 이후락이 중정부장이 되면서 중정으로 옮겨와 감사실장으로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이후락은 박대통령의 신임을 잃었고 이재걸 역시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손장군은 학성동 출신으로 부친이 해방 후 한때 울산읍장을 지냈고 이재걸은 성남동 출신으로 부친이 일제강점기부터 성남동에서 여관을 운영했는데 둘은 육사 동기였다.

이미 반세기가 넘은 이 사건이 최근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손장군이 이 사건과 무관했던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군사 법정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손 장군이 대법원 최종판결에서 무죄로 확정된 것이 2015년이었다. 고등법원에서는 최재형 판사가 선고하면서 “‘윤필용 사건’으로 우리나라가 아까운 군지휘관을 한명 잃었다”고 그의 억울함을 판시했는데 이 선고를 들으면서 손장군은 “군복을 벗은 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40여 년의 한을 풀었다”고 토로했다. 최판사는 나중에 감사원장을 거쳐 지난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손장군이 무죄 선고와 함께 나온 5억원의 배상금을 모두 육사에 기증했을 때는 다시 한번 전국 뉴스가 되었다.

이 사건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또다른 이유는 손장군의 부하였던 지성환씨가 ‘윤필용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이야기를 담아 <反芻>(반추)라는 책으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올해 아흔의 지씨는 아들이 지상욱 전 국회의원이고 며느리가 배우 심은하다. 손장군이 별을 달고 수경사 참모장으로 있을 때 지씨는 수경사 헌병대 대대장이었는데 ‘윤필용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육군 중앙범죄 수사단장으로 있었다.

당시 지씨는 국가 정보 관련 중책을 맡고 있었지만 그 역시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보안대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한 뒤 억울하게 옥중 생활을 했다.

그는 책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 사건으로 알려진 ‘윤필용 사건’은 실체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당시 박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군의 실세였던 윤필용 수경사령관과 또 남북평화협상을 위해 북한을 막 다녀와 박대통령의 신임이 높았던 이후락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당시 서울신문 사장이었던 신범식과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가 꾸민 음모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박대통령 신임을 얘기하자면 이 무렵 손장군 역시 이후락 못지않았다. 육사 졸업 후 초급장교로 박대통령이 사단장을 할 때부터 모셨던 손장군은 5·16이 일어난 후에는 박대통령 부관으로 문지기 역할을 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박장군은 그에게 리볼버 권총 한 자루를 던져주면서 “오늘부터 내 전속부관으로 일하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머리를 기댈 수 있는 긴 의자를 박장군 사무실 앞에 두고 이 의자에 앉아 박장군을 지켰다. 이러다 보니 박장군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특히 그는 박장군의 신임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육영수 여사가 가장 아꼈던 인물 역시 손장군이었다.

손장군이 부관으로 있었던 시절 한번은 육여사 앞에서 자신이 일선 부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육여사가 “우리 가족도 곧 민정 이양이 되면 군으로 돌아가는데 그때 함께 원대복귀 하자”면서 손장군을 말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손장군이 박대통령 신임을 더욱 받은 것은 민정 이양 때다. 이때 박대통령 측근들은 대부분 군복을 벗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당시 손장군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청와대에 이미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가자고 권유했다.

박대통령 역시 그에게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자는 뜻을 밝혔다. 그때도 손장군은 “저는 군에 있으면서 각하가 군인으로 이루지 못한 자주국방태세를 갖추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군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민정 이양 후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 30대대장이 된 것은 이런 그의 뜻을 높이 평가한 박대통령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12사태가 일어났을 때 장세동이 대대장으로 있어 유명해진 수경사 30대대는 대령 계급이 대대장직을 맡았지만 손장군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이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역시 박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그는 나중에 군사조직으로 문제가 되는 ‘하나회’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하나회’는 손장군이 소령이었던 1963년 전두환·노태우·김복동과 함께 육사 11기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그는 당시 ‘하나회’ 창립에 앞장선 이유를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윤필용과 함께 박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손장군은 윤장군이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가면서 함께 가자고 해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월남에서 돌아와 별을 단 후에는 윤장군이 수경사령관으로 있었던 수경사 부사령관 겸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의 그의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별을 단 지 꼭 100일 되는 날 쿠데타 가담자로 몰려 보안사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일년여 옥살이 후 그는 김우중 대우 회장의 도움으로 회사를 차려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손장군의 삶을 돌이켜보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왜 그가 ‘윤필용 사건’ 때 그를 신임했던 박대통령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또 박대통령이 왜 그를 불러 직접 ‘윤필용 사건’의 전모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는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자주 청와대로 가 박대통령을 만나 군 현안을 보고하고 사적인 대화도 자주 나누었다. 필자는 손장군에 대한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지난해 서울에서 여러 번 손 장군을 만났다. 이에 대한 손 장군의 대답은 이러했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무 억울해 박대통령을 찾을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보안사가 만들어 놓은 조서를 보니 내가 박대통령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도록 해 놓아 이를 포기했다. 내가 호소를 포기한 것은 당시 나의 개인 생각도 작용했다. 내가 수경사 부사령관이 된 후에는 윤장군이 박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윤 사령관으로부터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각하를 자주 뵙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각하의 입장에서 보면 평소 자주 찾아오던 내가 뜸하니 이상히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윤필용 사건’에 내가 연루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경모님(육영수 여사)이 내가 그런 일에 가담할 군인이 아니라면서 각하에게 진언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지성환이 쓴 <反芻>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책을 보면 ‘윤필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지대령은 많은 청와대 인사를 만났다.

이때만 해도 손장군은 박대통령을 만나 이런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지대령이 청와대 관계자들을 많이 만나면서도 왜 손장군을 찾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손장군은 “나를 찾아와 이런 소식을 알려주었다면 박대통령에게 사실을 얘기해 이런 억울한 일은 없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지씨는 이 책을 쓴 동기에 대해 “‘윤필용 사건’은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내가 나이도 있고 사건을 겪었던 사람도 나까지 셋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지금이 역사의 증인으로 나설 적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윤필용 사건’을 잘 알았던 인물들이 대부분 타계했으니 셋 중에는 손장군도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필자는 <反芻>가 나오기 전 손장군으로부터 ‘윤필용 사건’의 전모를 들은 후 손장군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회고록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손장군은 한 마디로 “각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노’라고 답했다.

손장군은 인터뷰 내내 박 대통령을 ‘각하’ 그리고 육영수 여사를 ‘경모님’이라고 불렀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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