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1950년대 경남고·경남상고 유학 간 울산수재들 거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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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1950년대 경남고·경남상고 유학 간 울산수재들 거쳐가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6.0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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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초반 김종신 서장이 울산에서 서거한 후 김 서장 부인이 부산으로 가 운영했던 구덕운동장 뒤 하숙집 터에 지금은 새로운 2층 건물이 서 있다. 당시 울산 출신으로는 박병환·김이열·박재필·최영수 등이 이 집에서 하숙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10년 전 김종신 서장 피살 사건 기사가 보도된 후(본보 2012년 12월24일자) 김 서장 유족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 서장이 울산에 온 때가 1951년 9월로 이후 울산에서 2년 6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치안유지와 공비 토벌에 앞장섰다. 그는 40세라는 당시로는 젊은 나이에 총경으로 승진하면서 서장이 되었지만 자신이 특채한 부하 김규식 순경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김 순경이 김 서장에게 총을 쏜 이유는 김 순경이 항상 술에 취해 보초를 서는 것을 알고 김 서장이 나무랐기 때문이었다. 사건은 1953년 6월7일 발생했다. 이날 김 순경은 술을 마신 후 총을 갖고 서장실로 들어와 김 서장을 향해 3발을 쏘았는데 이중 두발이 흉부를 관통하는 바람에 순직했다. 그는 서거할 때 부인과 아들 딸 각 한 명을 남겼다.

당시만 해도 유공자 가족에 대한 예우가 특별히 없어 김 서장이 순직해도 유가족은 그날부터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김 서장 부인은 남편이 서거한 후 곧장 부산으로 가 하숙집을 운영했다.

경남 고성 출신인 부인은 울산에 있을 때부터 생활력이 강해 주위 사람들은 그를 ‘여장부’로 불렀다.

하숙집은 부산 구덕운동장 뒤 부경고(옛 경남상고)와 대신중학교 사이에 있었다. 하숙집은 한옥 기억자형 기와집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들어서면 왼편 방에 김 서장의 아들 효일과 부인이 기거했다.

이외에 1층 방은 하숙생이 차지하다 보니 효일의 여동생은 다락방에서 생활했다. 이 집에서 하숙했던 학생 중에는 박병환과 김이열·박재필·최영수 등 울산 출신이 많았다. 이것은 김이열이 효일이와 울산에 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 김씨 주선으로 울산 학생들이 이 집에서 하숙했던 것 같다.

학교로 보면 박병환·김이열·최영수가 경남상고를 다녔는데 박씨는 김이열의 한해 선배이고, 최씨는 김씨의 한해 후배였다. 박재필은 당시 경남고를 다녔지만 김이열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김 서장의 아들딸은 둘 모두 머리가 영리해 부친이 울산에서 서거했을 때 울산초등학교를 다녔던 아들 효일은 경남중학교를 거쳐 이 무렵 경남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딸은 부산사범고등학교에 입학해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재학 중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딸의 죽음은 당시 부산 모 일간지에 보도가 되기도 했는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가정 형편상 대학 대신 사범 고등학교로 진학한 것이 한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 사람들은 추정했다. 당시 사범고를 나온 학생들은 대학 진학 대신 교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이 사범고를 많이 다녔다.

효일은 경남고 졸업 후 부산대학교를 다니다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로 편입했다. 이후 ROTC 장교로 월남전에도 참전하는 등 활달하게 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SK 박대윤 이사와 경남고 동창이었던 그는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할 때도 자주 울산으로 와 박 이사를 만나곤 했으나 오래전 지병으로 작고했다.

하숙생 중 박병환은 당시 울산 중앙시장 입구에서 가장 큰 주류상회를 운영했던 박규동 아들이었다. 박규동은 울산을 대표하는 야당 인사로 당시만 해도 힘들게 야당 생활을 했던 최형우를 많이 도와 최씨의 ‘양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울산제일중 3회로 심완구 시장과 동기인 아들 병환은 경남상고를 거쳐 동아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울산으로 와 태화동 일대에서 수도 공사를 했던 그는 부친 규동의 권유로 OB맥주 대리점을 운영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이 돈으로 심 전 시장이 야당 생활을 할 때는 적극 도왔다. 병환의 아들 기범은 그의 할아버지 규동을 닮아 현재 진장동에서 큰 주류 도매 상회를 운영하고 있어 박씨 3대가 울산에서 주류업으로 성공한 셈이다.

이와는 달리 김이열은 최형우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최씨가 울산에서 야당 활동을 시작한 한 때가 동국대학교 학생으로 2대 총선에서 민주당 김택천 후보를 도우면서다. 고향이 서생인 최씨는 이때만 해도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어려운 야당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야당후보를 돕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최씨는 이때 야당 활동을 하면서 자유당과 경찰의 탄압으로 울산에서는 자기 돈이 있어도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자유당은 경찰에 지시해 야당인 민주당 인사에게는 밥과 술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그를 도와주었던 사림이 김이열이었다. 김씨는 당시 자유당이 지원하는 울산반공청년단 선전부장이었다. 의협심이 강했던 김씨는 최씨의 이런 어려운 형편을 알고 최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음식 대접은 물론 때로는 용돈도 챙겨 주었다. 당시만 해도 무위도식했던 최씨로 보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둘은 아주 친하게 되었지만 정작 김씨는 1970년대가 되면 처가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만다. 이후 최씨는 8대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김영삼 정부 때는 여당 사무총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까지 올라 울산광역시 승격 등 울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최씨는 국회의원 시절 대사관 감사를 위해 캐나다로 갈 때는 부인 원영일 여사와 함께 김씨 집에서 한 달 넘어 쉬었다 오기도 했는데 이런 인연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울산이 광역시 승격을 할 때는 당시 안성표 시의장이 김이열의 동생인 김무열 시의원을 앞세워 최 장관 집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의회 차원의 광역시 승격 문제를 최 장관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김씨는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데 1980~90년대 캐나다에 유학과 이민을 갔던 울산 사람들 중에는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많다.

김 서장 집 하숙생 중 최영수는 부산대학교를 거쳐 울산 MBC에 입사해 나중에 상무까지 지냈다.

하숙생 중 박재필 부친 상룡은 옛날 성남동에서 보생당 약종상을 운영했다. 박상룡은 재필·재홍·재춘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머리가 좋아 주위 사람들은 박상룡 집을 ‘천재 집안’이라고 칭송했다.

재필은 경남고 졸업 후 부산 약대에 진학했다. 당시 재필과 함께 김 서장 집에서 하숙했던 최영수는 “재필 형이 하숙을 할 때 이미 영어를 잘해 원서로 된 영어책을 읽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면서 “재필 형은 이미 그때 클래식 듣기를 좋아하는 등 남다른 면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박씨는 전공을 살려보지도 못하고 대학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차남 재홍도 학생 시절 특별히 영어를 잘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재홍은 제일중과 경남고를 거쳐 인하대학교 졸업 후 중동으로 가 외국인 회사에 취직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귀국 후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그는 한 때 감포 앞 바다에서 종소리가 나는 것을 자신이 직접 여러 번 들었다면서 정부 차원에서 이 종을 건져야 한다는 청원서를 청와대에 내기도 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실제로 고려시대 몽골족이 침입했을 때 감포 앞 바다에 버려졌던 황룡사 종이 지금도 바다 밑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재홍이 하기 전 이미 감포 해녀들 사이에는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었다. 해녀들은 몽골족들이 황룡사 종을 몽골로 가져가기 위해 감포 앞바다에서 배에 실었으나 배가 출항하기 전 갑자기 일어난 풍랑으로 난파되는 바람에 종이 바다에 빠져 이후 흐린 날이면 그 종소리가 바다 속에서 들려온다는 주장을 하곤 했다. 따라서 한때는 해군이 한 달 넘게 배를 동원해 감포 앞바다를 수색 했지만 종은 찾지 못했다.

재홍은 이런 그의 주장이 무산되자 우울증이 더 심해졌고 결국 부산으로 가 살다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막내 재춘도 머리가 좋아 젊은 시절 이미 바둑 1급으로 울산 기계(棋界)에서는 명성을 떨쳤다.

김 서장 부인이 운영했던 옛 하숙집에는 ‘대신로 103번지’라는 주소가 적혀 있다. 옛집은 헐리고 지금은 2층 타일 집으로 변해 민속품과 고미술품 등 교육 자료를 팔고 있다.

옛 울산 하숙생들은 당시 울산에서 버스를 타면 서면에서 내려 전차를 타고 이 집으로 갔다. 또 울산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하숙생들은 부산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구덕운동장까지 가 이곳에서 20분 정도 걸어 하숙집에 도착했다.

70년 세월과 함께 하숙집 주위도 많이 변했다. 당시만 해도 하숙집 인근에는 좁은 골목이 많았지만 지금은 집 인근에 새 로터리가 생겼다. 이 로터리에는 각종 수목이 많이 심겨 있다. 옛 하숙집은 대신중학교 바로 서편에 있었는데 대신중학교는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강수철 내과 원장과 울산사람들에게는 ‘홍박’으로 더 잘 알려진 홍수진이 울산 하숙생들이 이 마을을 떠난 얼마 뒤 대신중학교를 다녔다. 강 원장은 대신중 졸업 후 경남고를 거쳐 부산의대를 졸업한 후 울산에서 개업했다. 홍씨는 당시 숙모가 대신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있어 중학생 때부터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하지만 그 역시 단명으로 세상을 떠나 아쉬움을 주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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