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해외 법무를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영문 머릿글자들로 된 생경한 단어들을 뒤섞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설명하려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과 관련된 이야기에도 이러한 단어들이 여럿 나오는 것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지난 9월15일자 경상시론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미국의 실정법임에도 불구하고 국내법 못지않게 많은 한국 기업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IRA의 입법 목적에는 미국 내 경제안보정책의 이행이 포함되어 있는데, 수출제품의 원료를 외국으로부터 공급받아 북미 시장에 판매하는 사업구조, 즉 글로벌 공급망을 거쳐 미국 시장에서 거래를 영위하는 한국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 못지않게 이 법의 적용이 초래할 거래관계의 변화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IRA를 포함해 미국의 경제 관련 규제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일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미국 정부의 관련 규제로서 우리 기업의 대미 사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수출통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관련 제도의 이해를 위해서는 수출통제개혁법(ECRA)과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이 제정한 수출관리규정(EAR)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규정은 2018년 제정된 이래 국제 경제의 변화를 끊임없이 반영하며 구체화하고 확장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반영해 2022년 2월 미국 외 국가에서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기술을 사용해 제조한 제품에 대하여 미국 정부가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이 추가되었고, 2023년 10월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는 첨단 기술로 제조된 반도체 칩을 중국이 구매하거나 제조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규범(SME Rule)이 다시 추가되는 식인데, 지켜야 하는 법제가 이렇게 계속 바뀌고 있으니, 이 법과 관련된 리스크 관리는, 의뢰인들에게 설명할 때 드는 비유를 들어 인용하자면,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된다.
한국 기업들이 노출된 IRA 관련 리스크에 있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달 초 미국 재무부와 에너지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친환경 전기차를 정의하는 중요 요건인 ‘우려되는 해외거래주체(FEOC)’의 해석 규칙을 공표했다. 이 규칙은 IRA가 시행된 지 만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제정되었는데, 이 규칙에 따르면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등 일정 국가의 정부에 의해 소유 또는 통제되거나 이들 정부의 관할 또는 지시에 따르는 자연인 또는 법인(FEOC)이 제조 또는 조립한 배터리 부품을 사용하거나 FEOC가 추출 또는 가공한 핵심 광물을 포함한 전기차는 세액공제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제조 또는 제조에 필수적인 광물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특정 국가들에 한정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국 정부가 1년여에 걸쳐 준비한 이 정교한 입법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FEOC 관련 미국 정부의 입법은 관련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유관 산업 내 기업으로서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사례이다. 이 디테일을 처리하기 위해 해당 내용을 이해하고 업무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관련 입법 동향을 계속 업데이트하며 숙지해야 하는데, 해당 업무를 수행할 역량을 갖춘 해외 법무 조직은 인적 자원 운용에 여유가 있는 대기업이 아니면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내부 역량이 부족하면 외부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상식이겠으나, 해외 법령의 해석과 적용에 필요한 자문을 수행할 수 있는 로펌들은 대부분 대형 로펌들로 기업으로서는 자문료 부담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북미 시장에서의 실적이 기업 생존과 성장에 필수적이라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해당 실적에 비례해야 할 리스크 관리에는 투입할 자원이 부족한 현실의 벽은 높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관련법 준수에 필요한 내부 컴플라이언스 조직을 구축하고 관련 업무 절차를 추가하는 대신, 대외무역법상 공공기관인 전략물자관리원(KOSTI) 또는 거래 중인 외국환은행에 문의하는 최소한의 대증적 방법에 가까스로 의존하고 있다. 규제 위험 관리의 중요성과 관련 지원에 대한 기업들의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