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가슴속 형상과 실상이 만나 그림이 되는 오묘한 자연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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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가슴속 형상과 실상이 만나 그림이 되는 오묘한 자연의 변주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4.07.09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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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같은곳을 바라보며 / 재료 : 수묵담채 / 규격 : 140×140cm / 화제 : 박노해의 시 같은곳을 바라보며…

한겨울 추운 겨울밤에 내린 함박눈에 푸른 댓잎에 쌓인 눈이 떨고 있다.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싱싱하고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군자의 인품에 비유하고 있으며 강직성과 절개를 상징한다. 대나무는 여위고 굳세며 고고하고 가지는 찬 눈을 맞으며, 마디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 마치 군자의 호기와 초탈함을 지닌 채 세속에 굴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대나무는 독립적이고 고상한 경계(境界), 맑고 아득한 의경(意境),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절조(節操)를 담고 있다.


문인화의 특징은 사의성·상징성에 있다. 북송대 소식(蘇軾, 1037~1101)은 문동(文同, 1018~1079)의 그림에 대해 “문동은 대나무를 그릴 때 대나무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사람이 보이지 않았겠는가. 자신의 존재마저도 망각하고, 그 자신이 대나무와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청신(淸新)함이 끝없이 배어 나온다. 장자가 없으니 누가 이 응신의 경지를 알아주겠는가(與可畵竹時 見竹不見人 豈獨不見人然遺其身 其身如竹化 無窮出淸新 莊周世無有 誰知此凝神)”라고 했다.


여기서 ‘응신(凝神)’이란 ‘장자’ <달생편>에 나온다. “공자(仲尼)가 숲에서 매미를 잡고 있는 곱추를 만났다. 그는 떨어진 물건 줍듯 매미를 쉽게 잡았다. ‘방법이 있습니까?’ ‘매미에게만 집중합니다. 매미를 잡을 때의 몸놀림은 마치 나무등걸 같고, 팔은 고목 가지 같지요. 나는 꼼짝도 않고 몰입해서 천하 만물 가운데 어느 것도 매미 날개와 바꾸지 않습니다.” ‘응(凝)’은 똘똘 뭉쳐 응축된 상태다.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흩지 않고, 오로지 한곳에 정신을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소식은 문동의 대나무 그림에서 대나무가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를 본 것이다. 문동은 대나무에 완전히 몰입하여 대나무도 없고 자신도 없는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통해 대나무와 자신이 하나가 된 경지를 보였다. 뜻을 한 가지에 집중하면 그 자연과 하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식의 문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응노를 생각해 봤다.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직접 몸으로 겪은 산증인으로서 대나무를 즐겨 그렸고 그래서 자신의 아호를 죽사(竹史)라 했다. 그는 어느 날, 비바람 치는 대나무 숲에서 눈과 마음으로 실물을 보지 않고 스승의 그림을 흉내만 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의 호를 ‘고암(顧菴)’으로 바꾼다. 그 후 그는 문동과 같이 대나무를 빌려와 자신의 심정을 담아내게 됐다.



그의 댓잎은 바람이 되고, 인간군상의 모습이 되고, 이응노 자신이 된 것이다. 그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인간과 댓잎의 움직임을 ‘춤’이라는 ‘죽엽무(竹葉舞)’ 연작으로 풀어냈다. 이응노는 젊은 시절 서예와 문인화에 대한 철저한 임모의 과정을 통해 그 속에서 자신만의 대나무를 찾게 된 것이다. 이렇듯 그가 배운 서예, 문인화와 유럽에서 배운 서양화법과 결합하여 자신만의 사의적 예술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이응노는 전통적인 동양화에 머물지 않고 문동처럼 대나무에 대한 응신의 사유 과정을 통해 이응노의 추상적 그림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7월 어김없는 다가오는 장마의 시간이다. 밤에 세차게 내리던 비는 가는 실비로 바뀌고 이른 새벽 발길을 재촉하여 시냇가에 앉아 대숲을 본다. 개울길 따라 흐르는 물은 길섶의 풀을 적시고, 자욱한 안개와 촉촉한 이슬이 대나무 가지와 잎새 사이에서 방울져 흔들리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인은 강렬한 시의(詩意)를 느끼고, 화가는 강렬한 화의(畵意)를 느낀다. 그러나 막상 가슴 속 형상이 눈앞의 실상과 만나 그림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그러한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 속에 놓여있다. 이것이 자연의 오묘한 변주(變奏)다.

투명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대나무를 바라본다. 무심한 일상에서 어떤 정경(情景)을 우연히 만나 내면에서 꿈틀대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을 담아 시인은 언어로, 화가는 그림으로 빚어낸다. 그렇게 한 편의 시가 완성되고 그림이 완성되면, 언어와 그림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다. 이미 자신을 떠나 살아 숨 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바람에 뭉쳐있던 굵은 이슬방울이 콧잔등에 떨어졌다. 찰나이다. 이내 비가 다시 내리고 있다. 대숲 사이를 거닌다.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는 댓잎들의 움직임, 대나무 줄기들의 굳건한 자세, 짙은 안개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의 맑은 기운을 느낀다.

글=김찬호 미술평론가·그림=이재영 문인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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