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얼마나 달라졌나/정치분야]산업수도 걸맞게 인구 늘며 정치적 영향력도 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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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얼마나 달라졌나/정치분야]산업수도 걸맞게 인구 늘며 정치적 영향력도 비례
  • 김두수 기자
  • 승인 2024.10.3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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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의회는 울산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 1997년 7월15일 개원했다. 당시 의원들은 울산시의회 의원 60명에 울산지역에서 선출된 경상남도의회 도의원 12명이 흡수되며 총 72명을 기록, 역대 가장 많은 인원으로 구성됐다. 울산시의회 제공

경상일보가 1만호를 발행하는 지난 35년 동안 울산의 정치사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불러왔다. 인구 400만의 경상남도 동부권 가운데 울산은 본보 창간 8년을 맞은 1997년 7월15일 전후의 정치사에도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는 평가다.

◇30~40년 역사 울산의 대표적 정치권 인사

울산의 대표적 정치권 인사 가운데 1989년 본보 창간 이전부터 유력 정치인으로는 상징적으로 ‘이후락으로 시작해서 이후락으로’ 정점을 찍은 가운데 ‘야당투사 최형우’의 부상으로 청와대 권력과 야당투사로 대별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된 최형우는 당시 울산시와 울주군을 합한 유권자가 13만4935명이었다.

이후 정부 유력인사로는 고 김태호 전 내무부 장관이 전설적인 인물이다. 여기엔 국회의원과 시장을 지낸 고 심완구 전 울산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 재임 중 비록 여야를 넘나들었다는 지적도 있으나 울산발전엔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는 분석이다. 헌정사 원내 교섭단체 정당 가운데 유력 대선후보도 있었다. 울산 동구에서 5선(서울 동작구을 선거구까지 7선)을 기록한 바 있는 정몽준(현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아산나눔재단 명예 이사장)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를 했으나 여론조사 경선에서 석패했다.

원내 교섭단체 당대표도 2명을 배출했다. 2018년 집권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정몽준 전 대표는 앞서 국민통합21 대표도 역임했다. 22대 국회 5선을 기록한 김기현(울산 남구을) 의원은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 당대표를 지냈다.

국회 상임위원장도 2명 배출했다. 3선 출신 최병국 전 의원이 법제사법위원장과 정보위원장을 역임했다. 3선 출신 이채익 전 의원도 행정안전위원장과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을 했다. 집권당 사무총장도 4명 배출했다. 최형우 전 내무장관은 민자·민정·민주계 등 3당 합당으로 재 창당된 후 YS가 총재인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을, 김태호 전 장관 역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또 3선 울산시장에 이어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박맹우 전 의원은 박근혜 정부 시절 세 번 사무총장의 진기록을 세웠다. 2선 서범수(울산 울주군) 의원은 윤석열 정부 집권당인 국민의힘에서 한동훈 현 대표 체제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산업수도 울산의 정치적 변천사

대한민국 산업수도 울산은 박정희 정권 당시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됐다. 하지만 서울 여의도 정치권의 정치적 영향력은 시쳇말로 변방일 뿐이었다.

이후 국내 산업 동력의 시발점이 된 울산은 자동차, 조선, 화학 등 3대 산업 위주로 급성장했다. 청년은 물론 중장년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일자리가 넘쳤다. ‘팔도 사나이가 모이는 곳’이 울산이었다. 경남도의 변방 5만 어촌마을에서 30여년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때는 120만 거대도시로 점을 찍을 때도 있었다. 정치적 영향력도 비례했다.

울산 공업지구 지정 직전 1961년 혁명 초반부터 동지적 관계로 함께 해온 울산출신 이후락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 2인자로 부상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자로 급부상한 이후락은 이후 여의도 정치권의 물밑 동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울산 정치권과 기업들마저도 이후락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9년 10·26으로 박 정권이 막을 내린 뒤 1980년대부터는 울산 정치권의 새로운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신군부가 출범한 뒤 울산은 친여권 인사로 평가된 김태호 전 내무부 장관과 민주투사로 상징된 김영삼을 중심으로 최형우 전 내무장관 등이 양대산맥으로 대척점을 이뤘다. 김 전 장관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제52대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이때가 ‘김태호의 황금기’로 불린다. 1989년 7월19일~1990년 3월17일까지 재임했다. ‘온산 최형우’는 1971년 8대 국회 총선에서 경남 울산시·울주군에서 야권 정당인 신민당 후보로 이미 원내에 진입했으나, 이후엔 부산 동래로 지역구를 변경했지만, 정치적 고향은 여전히 울산이다. 때문에 당시 울산 정치권에선 ‘김태호와 최형우’의 인맥이 양분되기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본보 창간 이후 처음 치러진 14대 국회의원선거(1992년 3월 24일) 당시 울산 선거구는 중구와 남구, 동구 등 3개 뿐이었다. 당시 울주군의 행정관할은 경남도다. 이후 30여년이 지난 22대 총선(2024년 4월10일)엔 울산 중구와 남갑·남을·동구·북구·울주군 등 6개 선거구로 확대됐다. 광역 및 기초의회 등 정치 지형도 여야 공존시대다. 기초 단체에서 명실공히 대한민국 산업수도로 한국의 경제 심장부로 업그레이된 오늘의 울산 정치 현주소는 늘 꿈틀거리는 역동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 1997년 7월15일 개원 당시 역대 가장 많은 72명으로 출발했던 울산시의회가 27년이 지난 2024년에는 22명의 시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울산시의회 회의가 열리는 본회의장 전경.  울산시의회 제공
▲ 1997년 7월15일 개원 당시 역대 가장 많은 72명으로 출발했던 울산시의회가 27년이 지난 2024년에는 22명의 시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울산시의회 회의가 열리는 본회의장 전경. 울산시의회 제공


◇경남도서 나와 홀로서기 성공한 시의정

울산광역시의회는 울산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 1997년 7월15일 개원했다. 울산시의회 의원들은 지난 1991년 3월 초대 울산시의원 선거 때 50명이 선출됐고, 1995년 1월 울산시·군통합 울산시의회가 개원하면서 64명으로 늘어났으며, 1995년 6월 제2대 울산시의회 의원 선거 때는 60명이 선출됐다.

이후 1997년 7월15일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경남도의회에 나가 있던 울산지역 출신 도의원들이 광역시의원으로 흡수되면서 72명을 기록, 역대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당시에는 의원 수가 워낙 많아 현재와 같이 의원마다 집무실을 배정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광역시의원으로서 실질적인 업무보다는 명예에 치중하는 경향도 강해 특별히 집무실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의 제8대 울산시의회는 국민의힘 19명, 더불어민주당 2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상임위는 의회운영위원회, 행정자치위원회, 문화복지환경위원회, 산업건설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이다.

김두수기자 duso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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