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허유미 ‘소라 맛 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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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허유미 ‘소라 맛 보려면’
  • 경상일보
  • 승인 2025.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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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맛을 보러 왔다며
술 한 잔 먹고 소라 몇 번 씹고
소라 맛 좋네 하는 손님에게 엄마는 말했다

고추 맛을 보려면 수백 개의 해와
수백 개의 달과 수만 개의 빗방울을 생각한 다음에야
아삭한 고추 맛을 아는데
소라 맛을 보려면 마라도 끝에서부터 오는 물살과
수십 번의 숨비소리를 생각한 다음 먹어야
소라의 고소함을 알 수 있어요

아주메 소라 맛 알다가 세월 끝나면 어쩌요

소라 잡다 세월 끝나는 사람도 있으니
소라 맛 알다 세월 끝나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소라 팔며 자식 키우다 세월 끝나는 부모가 있으면
부모 맘 알려고 세월 끝나는 자식도 있을 테고요
오늘 먹은 소라가 세월 끝 바라보는
여든 할머니가 잡은 소라예요

나를 힐끔 돌아보지 않고
해녀 식당 지붕 들썩이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노동과 세월의 무게가 버무려진 음식의 맛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흔히 음식 맛은 손맛이니 양념 맛이니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때깔이 좋아야 맛이 있다느니 하지만, 이 시에선 맛은 그 삶에 있다고 말한다. 고추 한 알이 영글기 위해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듯이 소라를 잡기 위해선 수많은 파고와 암초를 넘어야 한다. 그 힘든 세월과 노동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소라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라를 잡다 세월이 끝난다는 게 평생에 걸친 고된 노동의 삶이라면, 소라 맛을 알다 세월 끝난다는 것은 그 맛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아마 부모 자식 관계가 이렇지 않을까. 어멍이 소라를 잡는데 수십 번의 숨비소리가 필요하고 그걸 위해 한세월을 보냈다면, 자식이 그 어멍의 삶과 눈물과 사랑을 이해하는 데 역시 한세월이 필요하다.

제주의 푸른 물결은 그런 한세월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일 거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바닷물이 짠 것은 소금을 내놓던 맷돌이 물에 빠져 여태껏 돌고 있어 그렇다던데, 이거야말로 노동에 대한 탁월한 은유 아닌가. 음식의 맛 또한 저 소금처럼 그 안에 담긴 삶의 이야기와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우러나오는 것이리라.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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