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과장은 호텔 바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는 양주를 시켰다. 회식 자리에서 소주를 여러 잔 마신 그는 이미 취해 있었다.
“안 차장과 이런데 꼭 한번 오고 싶었어요.”
“정말요? 술도 못 마시는 날 데려와서 뭘 하게요?”
“에이. 오늘 같은 날 딱 한 잔은 마셔야지요.”
그는 잔에 술을 따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어색한 건배를 마치고 술잔을 입술에 댔다. 독한 술 냄새가 코를 확 쑤셨다. 얼른 입에서 잔을 떼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다음 빈 잔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 식으로 연거푸 석 잔을 마신 그는 술잔을 들고 나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안 차장님 부군께선 얼마나 좋으실까. 실력도 있는 데다 미모까지 겸비하셨으니.”
“부끄럽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아니요. 하나도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나는 우리 마누라가 안 차장님 반만 되어도 매일 업고 다니겠습니다. 동네방네 업고 다니면서 자랑할 거예요.”
“김 과장님 취하셨나 봐요. 사모님께서 아시면 혼나실 건데요. 호호.”
그는 갑자기 얼굴을 두 손에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처량해 보였다. 승진에서 여자에게 밀렸다고 울기까지 하는 남자라니 너무 나약해 보였다.
“정말 우리 마누라는 나를 때릴지도 몰라요. 밖에 나와 보면 이렇게 인생을 멋지게 사는 여자들이 많은데 우리 마누라는 그걸 몰라요. 자신의 손으로는 십 원 한 장 벌 줄 모르죠. 모든 건 내 책임이에요. 남자로서 쩨쩨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나요.”
“현모양처를 데리고 사시는군요. 과장님은 복 받은 남자예요.”
“살아보니 진절머리가 나요. 나는 능력 있는 여자가 좋아요. 안 차장님처럼…. 차장님이라 부르니까 정말 어울리네요. 승진 정말 축하해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김 과장의 눈 안에는 온갖 느낌이 다 들어 있었다. 엄마에게 무얼 사달라고 칭얼대는 아이의 눈빛도 들어있고, 어디 가서 실컷 두들겨 맞고 들어온 아이의 눈빛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병실 안에서의 시간은 무척 빠르게 지나갔다. 소염진통제 주사를 맞아서 그런가 잠자는 시간이 길었다. 아침밥을 먹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벌써 점심밥이 들어와 있는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