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맞는 인생2막- 이색 일자리로 다채로운 고령사회
빠르게 늘어나는 노인 인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지난 2022년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한 울산은 오는 2027년 초고령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을 정도로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울산의 향후 미래를 결정짓는 데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노인의 사회적 역할을 이제는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노인을 복지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데 익숙했지만 이젠 시야를 바꿔야 할 때다. 산업도시 울산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취약계층을 돕는 ‘시니어 소방대’부터, 은은한 커피향 속 두 번째 인생을 즐기는 ‘시니어 바리스타’까지, 울산 곳곳에서 축적된 삶의 경험을 자산으로 바꾸고 인생 제2막을 열어가는 시민들이 있다.
본보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노인이 도시 미래를 이끄는 또다른 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보고, 이들이 인생 제2막을 울산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갖춰야 할 지자체의 준비도 알아본다.

◇현대중공업 30년 업무 경험 살린 김학수 시니어 소방대
“화재감지기 관리는 매일같이 해왔던 일입니다. 퇴직했지만 이 경험이 혹시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될까 해서 지원했습니다.”
울산 동구 방어동 한 주택가에서 만난 김학수(67) 시니어 소방대원은 오전 9시가 되기 무섭게 주택가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올해 2월부터 동구 시니어 소방대원으로 업무를 시작한 김 소방대원은 HD현대중공업에서 퇴직 후 약 5년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김 소방대원은 앞서 현대중공업에서 30년 정도를 일했다. 배관사로 근무했었는데 주로 했던 업무는 안전관리였다.
그는 “화재감지기 작동 여부를 살피고, 설치돼 있지 않은 곳은 설치하고, 이건 내가 한평생 해왔던 업무”라며 “퇴직했지만 혹시 내 업무 경험이 다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원했다”고 웃어보였다.
홀몸노인 집에 들어선 김 소방대원은 우선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었다. 이어 집안을 둘러보다 화재감지기가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가방에서 화재감지기를 꺼내 부엌과 거실에 설치했다.
“삐용삐용하고 울리면 불이 난 거니깐, 바로 도망쳐야 해요. 연기가 많이 나도 바로 집을 나가야 합니다.”
어르신에게 화재 시 대피 요령까지 꼼꼼히 알려주고 나서야 업무가 완료됐다. 매일 골목 오르막내리막을 수시로 다녀야 하는 시니어소방대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르신들과 만나면서 농담도 하고, “한번 더 와주시면 좋겠다”는 인사를 들으면 보람이 든다고 김 소방대원은 설명했다. 그는 “교통지도 등 평범한 시니어일자리에서 벗어난 이런 일자리가 인생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며 “업무 경험을 살려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제2의 인생 찾은 윤경숙 시니어 바리스타
“바리스타로 일하는 첫날 손은 떨리고 맛이 없으면 어쩌나 속은 타들어가고…. 지금은 제 모습에 대견하면서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경숙(62) 바리스타는 남구 노인일자리 사업의 일환인 ‘담다 샐러드&에스프레소바’에서 2년째 바리스타로 근무하고 있다.
해당 매장은 60세 이상 노인 30여 명이 근무 중이다. 근무하는 이들은 모두 전문 조리사와 바리스타 교육을 이수한 뒤 현장에 배치됐다. 윤 바리스타는 퇴직 후 남구에서 주최하는 ‘베스트행정서비스의 날’ CPR 홍보교육관에서 일하던 중, 노인일자리 관련 홍보부스를 보고 궁금해 들어갔다 바리스타 참여 신청을 하게 됐다.
어떻게 바리스타에 도전할 생각을 했냐는 물음에 그는 “모든 시니어의 로망이라고 하지 않는가. 커피 내리는 일이 아름다워 보여서 언젠가 한 번은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해보고 싶었다”며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어 교육센터 야간수업을 곧바로 등록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처음 2급에 도전했지만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니 욕심이 생겨 1급까지 도전했다. 윤 바리스타는 “담당 선생님이 ‘박사 도전해도 되겠습니다. 답안을 너무 잘 작성하셨어요’라는 칭찬을 했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 생경했지만, 수업을 듣다 보니 재미도 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윤 바리스타는 매일 오전 7시30분에 출근해서 납품해야하는 샌드위치와 햄버거를 만든다. 가끔 영업시간 전에 주문하는 손님들이 있으면 커피를 내린다.
그는 직장을 다니던 시절과 지금 바리스타로 일하는 일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고 했다. 윤 바리스타는 “직장을 다녔을때는 익숙하고 반복적인 일에 회의감과 권태로움이 느껴졌었다”며 “지금은 스스로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예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도움의 손길’ 잇고 있는 이규태 시니어 산재가이드
“퇴직 후 같은 직장에서 시니어로도 다시 근무하니 감회가 새롭죠. 정년이 연장됐다는 느낌도 듭니다.”
울산시니어클럽 소속 시니어 산재가이드로 활동 중인 이규태(67)씨는 매일 아침 근로복지공단 남부지사 경영복지부로 출근한다. 올해로 4년째 같은 업무를 수행 중인데, 산재 피해자들의 아픔을 듣고 안내하며, 때로는 어려운 서류작성을 돕고 병원과 민원 창구 사이를 오가는 ‘가교 역할’을 자처한다. 그는 이미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에서 민원 안내를 돕는 시설방호요원 관련 업무로 6년을 근무한 경력이 있다. 정년퇴직 이후 직장 동료들의 권유와 ‘조금 더 시민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남구시니어클럽을 통해 현장에 돌아왔다. 산업도시라는 특성상 각종 산재 피해자들부터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도움을 구하러 찾아오는 등 이 산재가이드의 업무는 매일 바쁘다.
그는 “법률 관련 지식을 많이 알아야 해 업무가 단순하지 않지만 이전에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오랜 경험 덕분에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근로자를 대신해 통역 가능한 동료를 직접 찾아 민원을 해결해준 일이다.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를 고용노동지청과 법률구조공단에 연결해주는 과정도 직접 도왔다.
이 산재가이드는 “매일 일하는 덕분에 저 자신도 더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삶에 대한 태도도 한결 유연해졌다”며 “퇴직 후에도 적성을 살린 일자리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이런 일자리가 더욱 많아져 직장 경험을 살린 숙련자들이 시니어로 다시 현장에 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글=정혜윤기자 hy040430@ksilbo.co.kr
사진=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