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모란과 같은 순간의 아름다움
마음 하나 떠받쳐 줄 한 떨기 모란이 그리워
나는 온종일 헤매도 피로를 몰랐다
이 흥이 거나한 양 볼이매, 타는 노을이 고와라
기한(飢寒)을 참는 것은 죽음보다 더 슬펐고
정열은 분수처럼 내뿜을 수 있어 좋았다
오월을 담은 모란이 또 한 송이 뚝 지나 보다 <낙수첩>(1956년)

모란이 봄 데리고 떠날 줄 진작 알면서도 왜 그 꽃만을 나의 뜰에 고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자고 이 봄날 모란과 더불어 피어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겨울은 침침하고 음험한 계절이었습니다. 그 완고한 계절을 거치면서 온다는 소문도 없이 봄은 성큼 우리 곁에 왔습니다. 그 봄이 모란을 꽃 피운지 엊그제였는데 하마 모란은 봄을 앞세우고 저만치 떠날 채비를 서두릅니다. 정작 그 꽃 속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머뭇대기만 한 나는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요.
봄날이 다 무너져 내립니다. 어쩌자고 저 사나흘 뿐인 모란만을 고집 했을까요. 어찌하자고 어제 오늘, 하제면 고대 지고 말 모란만을 가꾸었을까요. 저렇듯 치근대는 봄날의 숨 소리가 모란꽃 떠날 즈음임을 예고하는 일인 줄 왜 몰랐단 말인가요.
해마다 오는 봄이요. 해마다 지는 꽃이건만 모란이 피는 봄날은 언제나 서럽습니다. 큰 어머니의 치마폭 같은 꽃, 집안 대소가내 두루 헤아려 아픔이든 기쁨이든 함께 보듬는 폭 넓은 아낙같은 모란에 마음을 배앗긴지 오래입니다. 그러면서 모란의 성정을 닮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 누가 모란 더러 향기 없다 했던가요. 저 부욱한 분향 같은 아주 귀한 분갑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은밀한 향기가 보란 한테는 있습니다. 은근히 성장한 여인의 선향(腺香)이 이러할까요. 검붉은 비단 광택에 눈이 먼저 물들고 그 빛깔이 천천히 마음에 와서 앉고 맨 나중에 관록과 품격으로 의연한 꽃 그리하여 왕비의 원삼과 활옷에나 앉는 꽃. 나의 뜰에 모란은 애초에 무모한 만용이었고 분에 넘치는 안복이었습니다.
위 모란 시조는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新調)’를 간행한 박병순선생이 등단 시집인 ‘낙수첩(落穗帖)’에 수록한 작품입니다.
아무렴 모란은 뚝 지는 맛이 멋이라고 하지만 모란이 이운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한분옥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