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기에도 살만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늙을 것을
굴레를 풀려나와 허허(虛虛)한 듯 실실(實實)하네
내 주름 그대 백발도 노을 속에 고와라 -<초대(동경)>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 꽃도 열흘 이상 붉기 어렵고 부귀영화도 오래가지 못한다.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하기 마련이요, 청춘도 한 때 오뉴월 하루아침 햇살 같다. 이울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며 지지 않는 하루가 어디 있더란 말인가. 누구라도 태어나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청춘도 그 가는 길 위의 한순간이며, 노년도 길 위 잠시 한 때일 뿐, 우리 모두는 같은 시간의 배를 타고 있는 동승인이다.
혼자 나이 먹는 것도 아니요, 혼자 늙어가는 것도 아니다.
떡잎이 바쳐 줘야 새잎이 나고, 낙엽은 떨어져야 다음 해 또 잎이 돋는다. 낙엽은 밟히다가 그 잎을 키운 나무 밑에서 거름이 되어준다. 자식 이기는 아비 없고 할아비는 말없이 손자의 거름이 돼주듯 우리도 밟고 가고 밟히는 낙엽 되고 마는 신세다. 자연의 이치가 그런 것을 천하의 왕후장상도 세월과 함께 가고 없는 것을 그 많은 영웅들이 살아 남아있는 분을 본 사람 있냐고 묻는다. 한번 오면 가는 것이 인생이다.
나이 먹는다고 슬픈 것만도 아니며 나이 먹어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나이 먹고 보니 그나마 치열한 산업현장이나 자식 교육에서나 긴밀한 부부 사이의 애정 갈등 같은 것에서 놓여난다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삶을 누리는 생의 준열한 몫을 감당해 내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적당한 교양과 적당한 예절을 갖추고 최소한의 생활비만 있다면 노후의 인생도 살만하다. 남들이 해외여행을 떠나면 가까이 명승지를 찾아 천천히 소요하는 맛도 크게 누리는 복일 것이다. 손자 손녀들 하교 길 돌보기도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이조경씨도 ‘나이들기’를 통해 인생 후반부를 의미 있게 즐기는 시조를 써서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해마다 피는 꽃을 보았고 날마다 지는 해를 보았으며 크게 미련도 없이 삶을 갈무리 할 줄 아는 노년이야 말로 인생을 사는 보람인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가기 위해서 온 것이다. 가기 전에 아직은 할 일이 있다. 할 일이 태산이다. 바람은 서늘하고 뒷산에 뻐꾸기가 운다. 한분옥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