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컴퓨터가 오류가 생겼을 때 초기화 버튼을 눌러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도 어려운 문제나 실패를 겪었을 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심리적 증상이다. 경쟁에 지치고, 계속된 실패에 자존감이 무너진 채,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갈망. 이 증후군은 단순한 우울이나 무기력과는 다르다. 그 안에는 벗어나고 싶지만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시스템적 포기’가 숨어 있다. 현재 상황을 벗어나면 인생이 리셋될거라는 리셋증후군 속에 청년들은 오늘도 집을 떠나고 울산을 떠나고 한국을 떠난다.
최근 한국 청년들이 캄보디아로 떠나 고액 아르바이트나 온라인 사무직 등의 구인광고에 속아 ‘스캠 센터’에 유입되는 사례가 연이어 보도됐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갔지만, 그곳엔 감금과 강제노동, 폭행과 협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 뒤에는 단지 개인의 부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년의 불안, 고용 불안정, 기회 부족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첫째, 일자리에 대한 불안이다. 한국 청년들은 이미 오랫동안 정규직 감소, 비정규직 확대, 청년실업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마주해왔다. 스펙을 쌓고, 인턴을 하고, 자격증을 따도 ‘내가 갈 곳은 없다’는 좌절감이 커진다. 결국 국내에서 미래를 보지 못한 청년은 ‘지금 이곳을 떠나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리셋 심리에 기대어 해외로 눈을 돌린다.
둘째, 고용 조건의 취약성이다. 해외 일자리는 한편으로는 기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비공식적 경로와 무계약, 보호 없는 환경이 대부분이다. 캄보디아에선 약 1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온라인 범죄 조직에 연루된 노동 구조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중 상당수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보호받지 못했고, 구조 요청조차 어려웠다.
셋째, ‘한탕주의’적 사고의 확산이다. 고용불안이 심화되면 청년들은 ‘지금 아니면 안 된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벌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놓인다. 특히 불안정한 삶의 경계선에 서 있는 청년일수록 단기간 내 경제적 전환이 가능한 경로를 좇게 되며, 이는 결국 제도 밖, 고위험의 유인구조로 자신을 밀어 넣게 만든다.
그들은 왜 떠나는가? 단순히 ‘해외 일자리’ 때문이 아니다. 떠남에는 절망이 있고, 조급함이 있고, 리셋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만들어낸 건,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도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이 사회다. 청년이 ‘떠나야만 산다’고 믿게 되는 사회는 이미 위기다. 리셋은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는 연결된 불안을 견디며 조금씩 나아가는 삶의 연속성이다.
청년이 리셋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이곳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회, 그 변화가 필요하다. 청년이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것이 진짜 복지이고, 진짜 국가다.
김민경 삶과그린연구소 소장 사회복지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