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조마조마 기다렸던 우리 딸의 사춘기가, 몇 달 새 부쩍 높아진 아이의 눈빛 속에 먼저 도착했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표정으로 요즘 들어 ‘대학’과 ‘수능’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학교 친구들에게 들었다며 “공부 못 하면 좋은 대학 못 가고, 좋은 대학 못 가면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못 해”라고 단정적인 공식을 읊을 때면, 아직 한 걸음 내디뎌 보지도 않은 미래가 벌써부터 아이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정체도 모르는 불안을 견디기엔 아직 여리고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세상에 지친 듯한 한숨을 내쉴 때면 부모로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좋은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태도로 공부하느냐에 따라 성적순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이 열릴 수 있다”라며 담담히 이야기해 보지만, 아이의 귀에는 닿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자기 마음을 공감하지 못한다며 속상해한다. 우리 아이만 유독 예민한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됐는데, 주변 많은 친구 역시 학업·진로·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내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나 역시도 어릴 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사회에 나오자마자 레이스가 다시 시작된 느낌이었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만으로는 삶을 이끄는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여러 상황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경험이었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 속에서 서로 배우며 노력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성장이 이뤄진다는 사실도 나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얼마 전 울산교육연수원에서 들은 KAIST 김대식 교수님의 강의는, 고민을 거듭하던 나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줬다.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이자 뇌과학자인 그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시원한 통찰을 들려줬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학교-공부-선생님-학원으로 둘러싸인 ‘가상현실’입니다. 이 세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현실의 이야기’는 닿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요즘 딸아이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이들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진짜 세계’의 무게를 이미 짊어진 채, 자신을 둘러싼 ‘가상현실’ 속에서 불안만 쌓아가며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교육과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이가 스스로 세계를 확장하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힘을 기르며, 삶의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돕는 방법 말이다.
오늘도 학교에서 돌아온 딸의 불안과 한숨을 들으며,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다. 아이들이 가상현실에 갇혀 불안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어른과 교육자의 역할임을 이해하고, 내가 먼저 찾아야 한다.
김건희 울산시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