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이음 청량리~부전 노선의 정차역 발표가 다가오자 동남권의 시계는 다시 ‘정차’에 맞춰졌다. 북울산, 남창, 기장, 해운대, 동래…. 이름이 늘어날수록 지역의 기대는 커지지만, 동시에 질문도 선명해진다. 고속열차가 고속열차로 남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서야 하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정차역 유치 논리의 힘은 분명하다. 역 하나가 생기면 생활권이 넓어지고 지역의 ‘철도 지위’가 달라진다. 특히 울산은 태화강역 중심 구조에 북부·남부 생활권이 얹히는 순간, 도시 내부 이동 구조가 한층 유연해질 수 있다. 지자체가 1년 넘게 유치전에 매달려온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정차는 단순한 교통 편의가 아니라 도시 설계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차가 늘어나는 만큼 ‘고속의 원칙’은 희미해진다. 울산~부산 구간은 광역전철·일반철도·고속철도가 겹쳐 달리는 민감한 구간이다. 이런 곳에서 가까운 역에 연속 정차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가속·감속이 반복되고 시간표는 더 촘촘한 여유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정차 논리가 힘을 얻는 순간, ‘고속성 유지’라는 또 다른 과제가 함께 커지는 셈이다.
그럼에도 철도 현실에서 환승은 단순히 ‘몇 분 더 걸리는 문제’가 아니다. 대기 시간과 이동 동선, 심리적 저항이 함께 붙는다. 같은 15분이라도 ‘동해선 15분+환승’과 ‘집 근처 KTX 직행’은 체감 가치가 다르다. 더구나 고속철도 정차는 교통 편의를 넘어 도시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역 주변의 투자 논리, 산업단지 접근성, 인구·주거 흐름은 ‘직접 연결’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새로운 속도로 움직인다.
태화강역에 모든 고속 수요가 몰리는 구조 역시 장기적으로는 부담이다. 주차와 접근 혼잡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북부와 남부에서 얇게라도 수요가 분산되면 시스템 안정성은 높아진다. 추가 정차는 ‘욕심’으로만 볼 사안이 아니다. 운영 리스크를 줄이는 선택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울산의 전략은 이분법이 아니라 단계론이어야 한다. 동해선과 태화강역의 연계 기반은 이미 마련돼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기반 위에서 북울산·남창 정차의 필요성과 효과를 구체적 지표로 증명하는 일이다. 당장은 ‘하루 1회라도 정차’라는 최소 진입을 목표로 삼고, 이후 이용 패턴과 수요 변화를 근거로 단계적 증편을 끌어내야 한다. ‘한 번이라도 서면 된다’는 울산의 현실론은 이 지점에서 다시 의미를 얻는다. 첫 정차는 종착역이 아니라 데이터와 명분을 쌓아 증편으로 이어가는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의 유치전은 ‘새로운 길을 여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연결망에 고속철도를 얹는 작업’이다. 울산이 바라는 것은 ‘정차의 과잉’이 아니라 ‘정차의 공정한 기회’다. 고속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울산의 연결성을 확장하는 추가 정차는 충분히 가능하며, 지금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울산이 내세워야 할 문장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 지역도 정차해달라”가 아니라 “우리 지역에 정차해야 전체 효율이 좋아진다”는 설계의 언어로 접근할 때 추가 정차의 당위는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석현주 사회문화부 차장 hyunju021@ksilb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