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래가 요구하는 과학기술 인재상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떠오른 영화가 하나 있다. 그 영화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이다. 1960년대 미국 NASA에서 일했던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실화를 다루는데, 이들의 주된 직업은 우주선의 복잡한 궤도 계산을 손으로 수행하는 ‘계산원(Calculator)’이었다.
그러나 IBM 컴퓨터가 NASA에 도입되면서 이 ‘계산원’이라는 직업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뛰어난 계산 능력 대신, 새롭게 등장한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적응력이었다. 이처럼 기술의 진보는 기존 인재의 역할과 필요한 역량을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지금 우리는 1960년대 NASA와 유사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의 등장은 기존의 많은 과학기술 직무에서 단순 지식 습득이나 기초적인 데이터 처리, 반복적인 실험기술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데이터를 처리 분석하고 공식을 유도하는 시대에, 미래 과학기술 인재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끈기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필수 무기가 바로 “몰입(Flow)과 그릿(Grit)”이다.
몰입은 긍정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한 개념으로, 어떤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이나 주변 환경을 잊는 최적의 경험 상태를 말한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몰입은 곧 혁신의 속도와 직결된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몰입 상태에 들어선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자신의 인지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최적의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새로운 알고리즘을 설계하거나 실험 데이터를 분석할 때, 깊은 몰입 경험을 통해 지식의 통합과 창의적인 통찰력이 발현된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넘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바로 이 몰입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혁신은 단발적인 성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과학적 발견과 기술 개발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긴 인고의 시간을 요구한다. 심리학자 앤젤라 더크워스가 강조한 그릿(Grit)은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릿은 장기적인 목표에 대한 꾸준한 열정과 이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결합한 역량이다.
AI가 모든 것을 빠르게 해줄 것 같지만, AI를 구동하는 핵심 기술을 개발하거나, 수년이 걸리는 기초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의지와 인내가 달려 있다. 그릿이 높은 인재는 실패를 ‘실패’로 규정하고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학습 과정의 일부’로 여기며 묵묵히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위대한 예술가나 과학자들이 다수의 걸작이나 위업을 창출해내는 것은 일정 시기 수년간에 걸친 탐구와 집중적인 몰입의 소산이라는 연구가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대학원 연구팀은 AI를 활용해 예술가와 영화감독 및 과학자와 관련된 빅데이터를 분석해 이 같은 패턴이 드문 일이 아니라 ‘마법의 공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애 어느 시기에서의 열정적인 성취는 다양한 스타일이나 주제 연구를 위한 수년간의 탐구에 이어, 깊은 전문성을 개발하기 위해 특정 영역에 집중하는 수년간의 몰입 개발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2021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게재됐다. 결국 장기적인 끈기(그릿)로 탐색과 집중(몰입)의 기간을 유지하는 것이 위대한 성취의 핵심인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인재 교육은 학생들이 IBM 컴퓨터 앞에서 무력했던 ‘계산원’이 아니라, AI라는 도구를 활용해 스스로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개척하고, 몰입과 그릿이라는 내적 엔진으로 무장한 창조적인 탐험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전환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미래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배성철 UNIST 교학부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