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름과 틀림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다름과 틀림을 구별해서 쓰지 않고 대체로 틀림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틀림은 옳다거나 바르다 등의 정답을 전제한다. 그러니 다름을 틀림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게 마련이다. 틀림은 상대에 대해서 대체로 적대적이거나 공격적이다. 그런 내 태도를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보지 않고 틀림으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또 있다. 소위 진영논리이다. 내 편은 무조건 다 맞고 상대편은 무조건 다 틀렸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객관적 논리 대신 편협한 주관적 생각만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 상대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니 말과 행동에 예의와 품격이 없어진다.
맹자는 양주와 묵적을 비판하면서 ‘벽이단론(闢異端論)’을 주창한 적이 있다. ‘양씨는 자기만을 위하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고, 묵씨는 사랑을 똑같이 하니,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금수이다. 양주·묵적의 도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그 이유는 비뚤어진 학설이 백성을 속여 인과 의를 틀어막기 때문이다. 인과 의가 틀어 막히면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다가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맹자> ‘등문공장구하’)
정통을 수호하고자 했던 맹자의 벽이단론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변질됐다. 그들은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모두 배척했다. 똑같은 성리학자라도 생각이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단정하여 심하게 비판했다. 사문난적은 정작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조선은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서 틀림과 다름을 구분할 줄 알고 대처해야 한다. 나와 다름을 모두 틀림으로 생각하여 마치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종교적인 이단처럼 취급하는 것은 사회의 분열만 초래할 뿐이다. 지금은 다름을 다름으로 보고 이해하고, 틀림을 틀림으로 보고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그래야 갈등은 줄고 화합은 늘어나는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송철호 문학박사·인문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