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가 남긴 고대 라틴어 작품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흔히 키케로는 플라톤과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했을 뿐 독창성은 없다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키케로의 독투스 오라토르(doctus orator) 즉, ‘박식한 웅변가’ 개념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시 한번 조명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박식한 웅변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 온 철학과 웅변술의 갈등을 이해해야만 한다.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철학자는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 진리를 쉽게 얻을 수 없기에 앎을 사랑하는 열망으로 자기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태도를 요구한다. 반면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당시의 웅변술 교사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진리는 허락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상황에 가장 알맞은 견해를 생각해서 대중을 설득시키는 웅변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고대 로마에서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웅변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키케로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지만, 뛰어난 웅변술과 지력으로 높은 지위를 얻게 된다. 키케로가 선배 철학자인 플라톤과 결별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진리만을 탐구하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이 그 사회의 공동체에 설득력과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화려한 언변으로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곧 선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식한 웅변가는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는 진리 탐구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고립된 인간이 아니다.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답을 뛰어난 소통능력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진리 탐구에 게을러서도 안 된다.
순수 철학 저서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뭘까. 일부 전문 과학자들의 강연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뭘까. 한국 사회에 독투스 오라토르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김남호 울산대 객원교수·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