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논쟁’이 뜨겁다.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집권당 내부로 번졌다. 단순히 친일파의 ‘범주’나 ‘청산’을 따지자는 것이 아닌 아주 퇴행적인 작태다. ‘언론중재법’을 놓고도 험한 말들이 오간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초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어떤 사회든 정적을 공격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사용한다. 상대의 약점을 들추거나 사실을 비틀어 부정적 인상을 심는 일은 다반사다. 심지어 시민의 그릇된 인식을 형성할 목적으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살포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통찰한 것처럼 인간과 사회의 속성일 터이다.
하지만 가짜 뉴스를 제조하고 진실과 거짓을 뒤바꿔 사익을 챙기려는 ‘뒤집어씌우기’는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몹시 고약한 병리 현상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세월 그런 상황에 노출돼왔고 최근에는 수법이 한층 교활해지고 있다. 시민의 경계가 요구되는 이유다.
지난 100여 년 동안 특히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뒤집어씌우기의 역사였다. ‘빨갱이’ ‘친북반미’ ‘민주화’ ‘친일파 청산’ 등의 말이 국민의 일상을 지배했고 권력의 치부를 덮어주거나 그런 권력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했다. 말하자면 이들 용어와 그것이 만든 이미지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알기 쉽게 해주고 어떤 결정을 가능케 해주는 믿음과 가치가 된 것이다. ‘국정 역사교과서’ ‘사드’ ‘북핵’ ‘지소미아’ ‘적폐’ 등은 물론이고 ‘조국 죽이기’와 ‘촛불’ ‘언론중재법’과 ‘언론재갈법’ 주장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고질적인 뒤집어씌우기의 문화와 에토스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공정과 정의’ ‘법치’ ‘언론의 자유’는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국민 다수가 공감한다. 그래서 정적을 공격하거나 아군을 방어하는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 그런데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 용어를 선점한 것은 아이러니다. 이전 정권에서는 그런 가치들이 실현되고 있었다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친일부역자가 독립운동가를 포상하는 코미디 같은 모습이 겹쳐 보여서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전도되어 제도화되고 그렇게 믿도록 의식화된 문화 속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적 가치이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뉴스와 여론 형성이 사실에 근거하고 역사적 맥락과 온당한 논리에 따라야 하는 까닭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거나 “정권에 강하게 국민에게 겸손하게 해야 정확한 보도”라는 식의 비교나 주장은 그래서 황당하고 유치하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사회적 이슈들은 사안별로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현안은 ‘기득권 보호’와 ‘적폐 청산’의 구호로 수렴되고 있다. 역사와 현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구토’만 남게 될 것이다.
역사는 ‘있었던 그대로’ 재현할 수 없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성’되기 마련이다. 이 점이 주는 메시지는 뉴스를 제멋대로 생산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지적된 말들이 어떻게 권력 관계를 조직하고 합법화하며 자명한 진리처럼 행사하는지 그 속성을 파악하고, 시민 각자가 접하고 있는 정보와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옛사람은 좁은 소견을 대롱으로 하늘 보기(管見)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특정 집단 혹은 사회의 담론(discourse)을 고집한다는 의미다. 좌파든 우파든 이란성 쌍둥이 같은 편협한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미래는 해묵은 담론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배 (사)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