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내가 즐겨 찾는 라디오 시사 프로를 들으며 한동안 잊고 있던 지난 정권 때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직장인들 점심시간과 퇴근길 차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시사 프로로서는 황금시간대의 그 시사 프로를 아예 확 폐지시켜버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점심 후 으레 들어오던, 그리고 마지막 8~9교시 강의가 있는 날이면 끝내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습관적으로 들으면서 가던, 그 시사 프로가 일시에 진행자도 프로그램도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이다. 웬 살림살이 정보와 신변잡담 프로들로 깔끔하게(?) 바뀌어 나왔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으로 몇 년을 보냈다.
물론 가사 정보 같은 프로도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걸 꼭 그 시간대에 편성해야 했을까? 국민을 우민화시켜보려고 그야말로 발버둥 치는 느낌이었다. 무슨 이런 정권이 다 있나, 아니면 알아서 기려고 이렇게 대놓고 아양 떠는 나팔수 경영진이 있나 싶었다. 어느 쪽이든 궁극에는 최고 권력자의 성향과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전두환 정권의 ‘3S정책’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대중을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로 길들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와 무관심으로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하는 우민화 정책으로, 과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대중을 순치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전두환 시절에는 특히 ‘땡전 뉴스’와 각종 프로 스포츠 대회를 소나기 퍼붓듯 출범시킨 수법이 유별났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유치부터(1981년), 프로야구(1982년), 프로축구-프로씨름-프로농구대잔치(1983년), 배구슈퍼리그(1984년) 시작이 모두 그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독재정권들이 안보와 치안을 이유로 수십 년간 고집해 오던 야간 통행금지를 일거에 폐지하고(1982년) 곳곳에 술판과 성매매 관련 업소와 에로영화와 포르노테이프가 넘쳐나는 사회풍조도 조장 내지 방조했다. 물론 지금은 국민소득 증가와 혁명적인 문화적 다양화, 정보혁명과 같은 사회경제적, 기술적 조건이 그런 흐름에 기름을 붓고 있지만(초미의 전인류적 관심사인 환경문제에는 이런 현상의 여파가 사실 심각하다.) 그 때는 정권의 정책이 거기에 불을 지르고 풀무질을 해댔다.
시사 방송 프로를 축출하여 대중들이 시사문제를 아예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는 정책도 그 전두환 시대와 다를 바 없던 아류 아닌가. 정권들이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그런 짓들을 하겠는가. 미상불 그 정권들은 수 만개 촛불의 함성 아래 탄핵의 수모를 당하거나 6월항쟁의 함성 아래 불명예 퇴진의 역사 속으로 가라앉았다. 길게 보면, 그런 술수가 사필귀정의 역사 흐름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방송정책을 중심으로 본다면 태극기부대나 야권 세력이 한동안 ‘독재정권’이라 칭하던 문재인 정권의 경우는 어떤가? 시사 프로의 양적 풍요로움을 본다면 너무 많아서 탈일 정도다. KBS1 라디오의 경우만 해도 아침·한낮·저녁·한밤까지의 시사 프로 4종 세트에다 경제관련 시사 프로와 여성 위주 시사 프로까지 오전 내내 시사 프로들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시사 프로가 양적으로 많이 편성된다고 해서 영국 BBC처럼 ‘방송의 공정성’이나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방송 자체의 노력도 필요하고 정치문화와 사회적 환경 변화도 뒤따라야 되는 것이라 단박에 그리 되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예나 지금이나 집권세력에 유리한 프리미엄을 얹어보려는 진행자들의 편향이 가끔 보이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이제 시사 프로 자체도 많거니와 적어도 정치성을 띠는 프로의 경우 여야를 대변하는 논객들을 균형 있게 출연시켜 시청자의 균형감을 존중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있는 편이다.
이제는 오히려 정권의 정책보다 SNS를 타고 무작정 확산되는 ‘가짜 뉴스’들이 더 심각한 문제다. 이것은 거기에 관련되는 당사자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사회나 국가, 심지어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에 치명타를 가하는 악의적 유형들도 포함된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근거 모호한 선거부정 소문이나 코로나19 관련 허위사실 유포 등이 심각한 문제이다.
유영국 울산과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