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은 흰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였다. 이슬은 해가 뜨면 흔적도 없이 말라버리는데, 사람들은 이를 인생에 빗대 부운조로(浮雲朝露), 즉 뜬구름과 아침이슬과 같다고 했다. 백로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고 후손들이 조상 묘를 찾아 벌초를 하는 시기다. 폭풍같던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한 가을이 갑자기 찾아옴으로써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를 실감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귀뚜라미가 가을을 알리는 대표 곤충이라면 벚나무는 가을초입을 알리는 대표 식물이다. 태화강가 벚꽃산책로에는 벌써 벚나무 낙엽이 수북해졌다. 4월 벚꽃엔딩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9월 중순이라니.
산 속 스님은 세월을 헤아리지 않고도(山僧不解數甲子)/ 낙엽 하나로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一葉落知天下秋). 이 구절은 <문록(文錄)>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당나라의 이름없는 시인의 시다. 이 시구로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성어가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다. 당나라 이자경은 ‘청추충부’(聽秋蟲賦)라는 시에서 ‘나뭇잎 한 잎이 떨어지니 천지는 가을이네’(一葉落兮天地秋)라 읊었다.

나뭇잎은/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벌레 먹은 나뭇잎’ 전문(이생진)
가을 알리는 귀뚜라미는 ‘소리의 달인’이다. 오른쪽 앞날개에 튀어나온 톱날같이 생긴 줄을, 왼쪽 날개 위쪽 가장자리에 비비면서 소리를 낸다. 귀뚜라미의 고막은 얼굴이 아니라 앞다리 종아리에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귀뚜라미는 종아리에 있는 고막을 이용해 소리를 모으고 이를 변환한 다음 그 주파수를 분석해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낸다. ‘칠월(음력) 귀뚜라미가 가을 알 듯 한다’ ‘알기는 칠월 귀뚜라미일세’ 등의 속담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시기를 잊지 않고 정확하게 일깨워줄 때 쓰는 말이다.
석화광음(石火光陰)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차돌 두 개를 양 손에 쥐고 서로 부딪치면 불빛이 한번 번쩍 하고 빛나는데, 유수같은 세월을 이르는 말이다. 이제 가을 문턱을 넘었으니 가을이 깊어지는 일만 남았다. 국어학자 이희승은 ‘이슬은 가을예술의 주옥편’이라고 했다. 요 며칠 이슬이 비처럼 내리고 있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