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은 세 번에 걸쳐 죽는대요
첫 번째는 심장이 멈출 때
두 번째는 흙 속에 몸을 매장할 때
세 번째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날 때
사람은 쉽게 죽어 사라지는 게 아닌가봐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죽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요
심장도 많이 필요하고요
그때까지는 살아있는 거라고요
공갈 젖꼭지 같은 것은 아니고요
아무 생각 없을 때도 몸에서 계속 자라나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처럼
그렇게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면면히 자라나는 작은 영생,
잠시의 영원이라고요
기억에서 사라질 때 진정한 죽음 맞이해

부모님은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계신다. 마리 로랑생은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고 하였다. 잊혔으므로 살았었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할 수 없다. 존재의 부재. 기억의 소멸은 존재의 소멸과 같다.
시인이 전하는 세 번에 걸친 죽음, 심장이 멈추고 흙 속에 매장되는 것이 물리적 죽음이라면 기억하는 사람들의 사라짐은 모든 걸 무(無)로 돌리는 더 근원적인 죽음이다. 기억에서 사라질 때 존재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누군가, 세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기억한다면 그는 살아있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이 자라듯 그는 ‘나’의 사랑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작은 영생’이고 ‘잠시의 영원’이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죽더라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죽는다 해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 우리는 ‘작은 영생’이 아닌 영영 영생하는 것은 아닐까. 기억을 기억하고 기억하는, 그것이 역사 아닐까. 우리는 사랑의 사랑의 사랑으로 길고 긴 이야기를, 세헤라자데처럼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영영세세 세세영영.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