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도심 성터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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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도심 성터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
  • 경상일보
  • 승인 2023.10.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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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삼건 울산역사연구소 소장 공학박사

울산광역시 중구에는 유서 깊은 ‘경상좌도병영성’(이하 ‘병영성’)과 ‘울산왜성’(이하 ‘왜성’)이 있다. 앞의 것은 국가지정문화재(사적)이고, 뒤의 것은 지금은 지방문화재이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에 현재의 ‘사적’에 해당하는 ‘고적’이 되었으니 지정문화재로서의 역사는 1987년에 사적이 된 병영성보다 무려 52년이나 앞선다.

이처럼 왜성이 병영성보다 반세기나 앞서 고적 지정이 되었던 이유는, 식민지 지배국 일본의 조상들이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1916년 당시 울산의 일본인들은 ‘성지보존회’를 만들고, 1917년에는 울산경찰서장이 왜성에 공원을 조성해서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울산왜성은 일본인들이 용장으로 흠모하는 가토 키요마사가 쌓았고, 조명연합군의 파상 공세에도 결국 버텨냈다는 무용담이 합쳐져서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울산왜성은 1935년에 부산진 자성대와 함께 한반도의 왜성 중 첫 번째 고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런 중구의 두 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도심의 주거지역에 위치한 넓은 면적을 가진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주거지역의 지정문화재는 법과 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외곽경계에서 200m까지는 규제를 받는다. 위성지도로 대략의 범위를 측정해 보니 병영성은 90만㎡, 왜성은 30만㎡ 이상의 면적이 영향 범위에 들어간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영향 범위 내의 토지소유주나 건축주 등은 재산상의 피해를 호소하고, 행정의 경우도 이와 관련된 각종 사무나 민원이 만만치 않다. 문화재를 보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내 집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재산상의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도 멀리 따져보면 일본식민지 지배에 있다. 일본의 많은 도시 중심부에 있는 성터 대부분은 현재 성곽 자체의 모습으로 있거나 박물관, 체육관, 음악당, 학교 캠퍼스 등으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으로 각 지방 호족의 성곽을 접수한 다음 이를 허물고 군사시설로 개조했던 것이 2차대전 패전으로 일본군이 해체되자 드넓은 성터가 갑자기 선물처럼 시민의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읍성 터에 식민지 지배기관이 자리 잡고, 일본식 상가와 주택이 들어서면서 국유지였던 성터는 물론 성내의 수많은 국유토지가 쪼개지고 갈라져서 사유지가 되었다. 해방 무렵 우리 도시의 중심부는 일본 도시와 외관상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이 되었다.

20세기 100년간 이런 큰 변화를 두 차례 겪고 남은 것이 병영성터와 왜성 모습이다. 웅장하던 성곽은 대부분 허물어져서 터만 남고,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이 즐비하던 관아 건물도 사라졌다. 이런 파괴의 시대를 거치고 남은 유적이 문화재가 되었고, 다시 그 보호구역 200m 범위까지 규제가 생기다 보니 직접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은 문화재에 대한 보호 의지나 자부심보다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사회적 문제의 해결 방안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관련 법규를 충실히 따르는 토지 이용 방식이 있다. 실은 규제란 상대적이다. 집을 지을 수는 있지만 같은 용도지역이면서 문화재 관련 규제가 없는 곳과 비교해서 건물 높이나 외관에 영향을 받다 보니 주어진 용적률을 쓸 수 없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런 규제를 역으로 활용해서 한옥 풍의 건축으로 특화하고, 그런 건축을 선호하는 사람이 생활하거나 이용하면 된다. 제도적으로는 경주 황리단길이 있는 황남동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처럼 공공이 한옥 건축에 지원할 수 있다면 아주 효과적이다.

두 번째는, 외국, 특히 미국처럼 ‘개발권 양도제’ 도입과 적용이 필요하다. 규제로 인해 쓸 수 없는 용적률을 개발이 가능한 곳으로 팔 수 있다면 상대적 박탈감은 줄어들 수 있다. 세 번째는 규제를 받는 곳의 건축물과 토지를 민관 투자자가 매입해 용도에 맞게 재정비하는 방법도 있다. 어느 것이나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문화재보호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 울산의 경우 예전에 공장 설립을 위해, 혹은 공해 피해나 댐 건설 때문에 대규모 이주를 한 경험이 있다. 이런 울산의 독특한 경험을 참고로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을 지키는 방안을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한삼건 울산역사연구소 소장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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